The Philosopher's Haven

어느 20대 후반 남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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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열리는 수도꼭지

abcdman95 2020. 5. 27. 15:10

천천히 열리는 수도꼭지.

 

가족과 전화통화를 하던 중 내 경제사정을 빗댄 말이다. 의미인즉슨 경제적 수입이 비록 지금은 형편없지만 천천히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였다. 대학원생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뭐.

 

내가 처음으로 직접 번 돈은 대학교 2학년 봄학기 (미국 학제 기준 2학기) 때 내가 A-를 받았던 동력학기초 수업의 조교로 일하면서 받은 200달러 남짓이었다. 매주 10시간씩, 시급 10달러를 받으며 일을 해서 꼬박꼬박 용돈을 벌었고, 돈을 번다는 행복감 외에도 나중에 내 이력서에 적어 넣을 만한 무언가가 하나 더 생겼다는 안도감(?)까지. 격주로 200달러를 받으며, 세금을 제하면 180달러 남짓이었지만 난 그 돈으로도 행복했다. 생전 처음 직접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좋았고, 코딱지만한 그 돈으로 엄마에게 이제 학비만 보내줘도 돼! 교과서는 내가 알아서 살게. 라고 괜히 뭐라도 된 것마냥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래, 누구는 집안이 부유해서 방학 때는 유럽여행도 가고, 내가 한겨울에 강추위에 덜덜 떨며 버스를 기다릴 때 부모님이 사준 차를 끌고 쇼핑을 가고 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부러울 때도 있었다. 누구는 세상 잘 만나서 스무 살밖에 안 먹고 멋진 차를 끌고 다니는구나, 누구는 새로 출시된 아이폰을 시장에 물량이 풀리자마자 사는구나, 누구는 그 비싼 15인치 맥북프로를 사는구나, 그런 생각이 종종 든 적이 있었다. 비트코인이 한창 뜨거운 감자가 될 즈음, 그거 좀 채굴해 보고 싶다며 당시 꽤나 고급이었던 (그리고 현재도 나름 괜찮은) GPU인 엔비디아 GTX 1070을 4개나 구매해서 SLI로 묶어 취미로 돌리는 걸 보고 괜히 부러운 적도 있었다. 그리고 2017년 여름, 8년간 꾸역꾸역 쓰던 내 노트북이 마침내 사망했을 때에는 새 노트북을 구매하기 위해 그동안 모은 돈을 탈탈 털면서, 그리고 그렇게 지갑을 털어도 내가 진정 원하는 좋은 노트북을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고서 갑자기 서러웠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나는 가족과 약속했던 대로 경제적 지원을 일절 받지 않게 되었다. 미국에서 석사를 하려면 장학금을 받거나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미국 시민권자도 아니며 부잣집 아드님도 아닌 나는 박사를 지원해야 했고, 그렇게 대학원 생활 동안의 경제력 문제는 그럭저럭 해결했으나 정착 비용이 문제였다. 대학 때 노트북을 새로 구입해야 했기에 수중에 있는 돈은 없다시피 했고, 해서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목돈을 마련해야 했다.

 

그 목돈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가족에게 그 엄청난 학비를 지출케 했던 모교에서 받게 되었다. 2018년 여름, 4년만에 귀국한 나는 민족사관고등학교에서 매 여름/겨울방학마다 진행하는 GLPS (Global Leadership Program for Students) 캠프에서 3주간 강사로 일하며 세금을 제하면 약 280만원을 받았고, 그 돈으로 여차저차 대학원에 와서 정착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수입은 항상 일정했다. 2주마다 약 900달러씩. 한국으로 치면 연봉이 3천 정도 되는 건데, 세금을 제하고 나면 2800만 정도 된다. 이쪽 물가를 고려하면 말 그대로 생존권 + 약간의 용돈을 주는 수준인데, 애초에 난 돈을 주기적으로 쓰는 곳이 생필품 외에는 없어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매달 월세 550달러, 전기세 등 유틸리티 60달러, 휴대폰 플랜 60달러, 자동차 보험 120달러. 매달 버는 1800달러 남짓 중 이를 제외하면 식비와 기타 비용에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생긴다.

 

위에 자동차 보험을 언급했다. 맞다, 난 대학원에 온 후 몇 달이 지났을 때쯤 저렴한 자동차를 한 대 구매했다. 2007년식 볼보 S60. 튼튼하고 안전하며 석사 학위를 취득할 때까지는 버텨 줄 수 있는 차량. 이 역시 내 신용카드로 긁었다. 물론 이걸 구매한 후 수리비까지 얹어서 할부로 갚느라 고생을 좀 했지만, 이쪽 대중교통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헛되이 쓴 돈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 차 덕에 대부분의 20대 초중반 한국인 청년이 꿈도 꿀 수 없는 경험을 했으니까 말이다. 직접 번 돈으로 똥차를 사서 미국 고속도로를 8시간 동안 내리 달려본 사람이 내 나이 또래에 얼마나 되겠는가. 그 똥차를 직접 정비해 본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으며, 직접 정비할 수 없는 문제를 수리하러 자동차 딜러에게 갔을 때 넉넉지 않은 지갑사정을 고려해 어떤 문제를 수리하며 어떤 문제를 방치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을 겪어 본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사서 고생이라지만 이런 고생은 한 번쯤 해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대학 때보다 수입이 훨씬 늘기는 했지만 의식주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학부 때와는 달리 이젠 의식주도 혼자 해결하게 되었다. 다행인 점은 내가 음주는 거의 안 하는 편이며 흡연은 평생 할 생각이 없는 데다가 딱히 외식을 즐겨 하는 편도 아니다 보니 안 쓰는 돈은 내가 원하는 곳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지난 글에 언급했다시피 2017년에 800달러라는 당시 거금이었던 돈으로 구매한 노트북을 중고로 팔고 총 1500달러에 달하지만 지금은 딱히 거금이 아닌 돈으로 데스크탑을 새로 마련했으며, 세컨드 노트북으로 사용하려고 600달러를 들여 리퍼로 구입한 서피스 랩탑을 중고로 팔고 780달러를 들여 실구매가 1200달러인 신품 델 XPS 13을 구매했다. 말 그대로 관심 가는 것에 돈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쓰다 보니 엄마 생각이 났다. 데탑을 구매하기 훨씬 전부터, 델 XPS를 구매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부터. 엄마가 미국 드라마를 재미로도 보지만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서도 보는데, 막상 보고 싶어도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영상은 저화질에 자막도 없고 길이도 10분 내외인지라 심히 불편해했었다. 그래서 난 지금까지 넷플릭스 구독을 유지 중이다. 2019년 초에 처음 넷플릭스 구독을 했을 때는 내가 보고 싶어서 했었는데, 난 유튜브로 넘어간지 오래라 넷플릭스를 거의 볼 일이 없지만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계속 구독을 유지할 생각이다. 내가 안 봐도 엄마가 보니까. 요즘도 엄마가 너 넷플릭스 자주 보냐고 물어보면 자주 본다고 거짓말을 한다. 사실 한달에 두세번 볼까 말까인데, 내가 안 본다고 그러면 돈도 없는데 구독 취소하라고, 당신은 안 봐도 된다고 면박을 준다. 난 엄마한테 내가 안 보는만큼 엄마가 많이 보면 충분히 뽕 뽑는 거니까 걱정 말라고 그랬는데, 엄마도 쉴 때마다 넷플릭스를 보는 게 너무 좋은지 별 말은 안 한다.

 

그 외에는 가족을 방문할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선물을 주기도 참 애매하고, 내가 선물 준다고 예고를 하면 아빠도 엄마도 펄쩍 뛰며 주지 말라고 하는지라 깜짝 선물을 보내 주는 걸 선호한다. 처음 깜짝 선물은 학부생 때, 엄마 생일을 몰래 기억하고 있다가 스타벅스에서 주문해서 캐나다에 있는 집으로 배송시킨 50달러짜리 기프트카드와 짤막한 영문 메시지가 담긴 선물상자였다. 그 때 엄마는 이게 뭐냐며, 꽤나 어리둥절했다가 내가 보냈다고 그러니 괜히 이런 걸 왜 보내냐며 울먹였었다. 깜짝 선물의 묘미랄까. 그 50달러 기프트카드를 엄마는 아무때나 쓸 수 없다며 동생과 미국으로 도로여행을 갔을 때 맛난 커피와 간식을 사서 동생과 먹는 데 사용했단다.

 

최근에는 또 뜬금없이 깜짝 선물을 보내줬었다. 지금까지 기프트카드도 그렇고 넷플릭스 구독도 그렇고 엄마만 뭔가를 해준 것 같아 아빠가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번에는 아빠 선물과 함께 보냈다.

 

먼저 엄마 선물은 흰색 갤럭시 버즈. 갤럭시 버즈는 내가 이미 1년 전에 구매해서 정말 잘 쓰고 있는 물건인데, 캐나다 집에 가끔씩 놀러갈 때마다 엄마가 애플이 아이폰에 기본으로 포함해 주는 번들이어폰을 엉킨 채로 대충 꼽고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다가 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떠올린 선물이다. 나도 누워서 유선이어폰으로 영화보던 시절이 있었고, 그게 얼마나 불편한지 난 잘 알고 있으니까. 난 검은색을 샀는데, 친구가 사용하는 흰색 갤럭시 버즈를 보니 뭔가 하늘하늘한 진주색이 도는 게 너무나 예쁘기도 하고 엄마가 사용하는 흰색 아이폰8과 잘 어울릴 것 같다 싶어서 흰색으로 주문했다.

 

다음 아빠 선물은 미술용 연필세트. 아빠는 작년 말에 은퇴한 후 오랫동안 곁에 있지 못했던 엄마와 동생과 같이 살게 되었는데, 공대 출신이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집에 있는 도구라고는 싸구려 샤프뿐. 그래서 이런저런 검색을 해본 후 파버카스텔 사의 카스텔9000 세트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그림을 그리려면 여러 가지 경도의 연필심이 필요하다길래 HB만 12개 있는 걸 주문하려다가 3B부터 3H까지인가, 12가지의 경도가 하나씩 들어 있는 세트를 골랐다. 가격대만 보면 엄마의 갤럭시 버즈보다 훨씬 싸지만, 선물을 보내는 데 돈의 가치가 중요하던가.

 

이번의 깜짝 선물에 대한 가족의 반응 역시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아빠는 신종 사기인 줄 알고 택배상자 개봉하는 과정을 모조리 동영상으로 찍기까지 했단다. 그런데 상자를 열어 보니 연필과 무선이어폰이 들어있는 걸 보고선 뭔가 아빠와 엄마가 원했던 것과 비슷한 것 같아 나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내가 보낸 것이 맞다고 하니 놀라면서도 뭔가 멋쩍고(?) 고맙고 그런 눈치였다. 이래서 내가 아빠는 그림 그릴 때 연필 뭐 쓰냐고, 엄마는 넷플릭스 볼 때 이어폰 자주 쓰냐고 물어본 거였냐며.

 

아빠가 그 연필을 받은 이후로 그린 그림은 아직 보지 못했다. 당신이 이런저런 게 있으면 좋겠는데 라며 떡밥을 던지면 아들이 눈치 딱 채고 집앞에 원하는 물건을 배달시켜 주는 게 이런 기분이냐며 좋아하던데 (나중에 집앞에 뭐가 배달될 줄 알고?), 공대 피는 못 속인다며 역시 말투는 츤데레였다. 미알못(미술을 알지 못함)인 나로써는 연필심의 경도가 그리 중요한가 싶기도 하고, 지우개랑 별의별 도구 세트를 골라 주고 싶은데 뭘 고를지 몰라서 연필만 보낸게 못내 아쉽기도 하다. 나중에 한국에 가면 아예 화방에 가서 아빠가 필요한/원하는 모든 미술도구를 (내 지갑이 버텨 주는 한에서) 선물해 줄 생각이다.

 

엄마는 이번엔 아예 울었다. 집에서만 있는데 뭐 이런 걸 사주냐며, 보면 뭔가 참 너무 이쁘면서도 당신이 이런 걸 가질 자격이 있나 (응? 엄마가 키운 아들이 사준건데요?)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단다. 뭐 처음이야 그렇지, 며칠 후에 전화해서 얘기하다 보면 나보다도 자주 쓰는 것 같다. 넷플릭스를 보다가 영어 대사가 이해가 안 되서 동생에게 도와 달라고 노트북을 들고 갈 때 이어폰을 뽑고 할 필요 없이 그대로 일어나서 가도 되고, 이어폰을 뽑으면 재생되던 영상이 자동으로 중지되고, 이어폰의 터치패드를 톡 치면 다시 영상을 이어 볼 수 있는, 내 또래의 젊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신기해하는 엄마가 뭔가 안쓰럽기도 하면서 흐뭇하기도 했다. 노트북으로 넷플릭스를 보며 영어공부를 하다가 이어폰 케이스를 살짝 열어 보면 보석함 여는 것 같고 이어폰을 볼 때마다 내 생각이 난다며 카톡을 보내곤 한다.

 

이제 선물해주고 싶은거 다 선물한 거냐면 그건 아니다. 내가 델 XPS를 구매한 후 이 녀석에 딸려 온 128기가 SSD를 512기가 SSD로 교체하면서 128기가 SSD 부품이 남게 되었는데, 이걸 엄마가 쓰는 노트북에 달아 주면 노트북으로도 신세계를 체험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기술적인 얘기지만 이 SSD는 M.2 형태라 7년 된 엄마 노트북에는 호환이 안돼서 10달러 가량을 들여 M.2형 SSD를 2.5인치형으로 바꿔 주는 어댑터를 구매했는데, 엄마에게는 그냥 이거 공짜라고, 여기 안 달면 버리는 부품이라고 얘기할 생각이다. 2세대 i5 CPU에 4기가 램이 달린 노트북을 쓰면서 이거 아직 쓸만하다고 하는 엄마에게 노트북을 새로 사줄 여유는 없지만, 그 노트북을 정말로 쓸만하게 만들어줄 능력은 있으니까.

 

내 동생은 대학 입학할 때 특별한 선물을 사줄 생각이다. 자신은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도 못하겠지만, 내가 엄마와 놀이동산을 가서 놀이기구를 타고 철도박물관에 가서 기차를 보며 신기해했던 나이에 나 때문에 재밌는 기억이라곤 가족과 디즈니랜드에 놀러가서 공주님을 만난 것밖에 없는 동생에게 노트북을 한 대 사주고 싶다. 내가 내 노트북을 고를 때처럼 사양 타협해 가며 가격대에 벌벌 떨면서 700달러도 비싸다며 사는 노트북 말고, 동생이 정말 꽂히는 노트북 한 대 아무거나. 그게 16인치 맥북 프로가 될지, 13인치 델 XPS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와 아빠 몰래 동생과 놀러 나가서 2백만원짜리 노트북 상자를 한 대 들고 오는 것. 한국 가면 꼭 해보고 싶다. 내 학비 대 주느라 동생은 유학도 마음대로 못 가게 생겼는데 이 정도로도 부족하겠지만.

 

내가 내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소비 습관도, 그리고 내 가족에게 전해 주고 싶은 깜짝 선물의 규모도 점차 늘어날 것이다.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그 소비 규모도 커질 것이고, 안정적인 직업을 찾고 진정한 경제적 안정을 찾아 가며 또 가족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생기지 않을까?

 

그래서 난 천천히 열리는 수도꼭지다. 지금은 그저 물이 쫄쫄 나오지만, 언젠가는 샤워기처럼 시원하게 내리꽂을 수도꼭지.

 

오늘의 추천곡은 오랜만에 가사가 없는 곡이다. 센티멘탈 시너리의 'E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