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hilosopher's Haven

어느 20대 후반 남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IT 얘기들

4달만에 돌아왔다.

abcdman95 2020. 5. 8. 10:31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게 1월 중순이었던데, 오래 전이라면 오래 전이겠지만 그닥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3월 중순부터 사실상 집에 갇혔기 때문이었다. 수업은 모조리 온라인으로 전환되었고, 연구실은 문을 닫았으며, 자주 가던 식당 역시 장기휴업에 접어들었다. 그나마 문을 닫은 연구실에는 연구실장에게 특별히 허가를 받아서 제 집 드나들듯 돌아다닐 수 있지만 그 외에는 갈 수 있는 곳이 없다.

 

평소에는 아침에 연구실에 가서 일을 하다가 점심 식사를 하고 (물론 귀차니즘 + 실험 일정 때문에 거를 때도 많다) 수업을 들으러 가거나 계속 실험을 이어가고, 저녁 때에 집에 돌아와서 휴식을 했다. 그 외에 월/수/금요일에는 아는 형과 운동을 하러 가고, 매주 금요일에는 한인회 사람들과 점심 식사를 하는 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다. 가끔씩은 기분을 내러 친구와 외식을 하기도 했고. 하지만 3월 중순부로 그 모든 일상은 박살이 나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실험실에 가도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집에서는 더욱 할 일이 없다. 운동을 할 수는 있지만 기구라고는 25파운드급 아령 1개밖에 없으며, 유튜브질도 하루 종일 하다 보면 은근 미칠 노릇이 되어 버린다.

 

얼마 전 미 정부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의 소비 습관이 위축된 것을 고려해 'Coronavirus Stimulus Check (코로나바이러스 지원금) 1가구당 $1,200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는데, 다행히도 나는 미국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올해 미국 거주 6년차임과 동시에 지난 몇 년간 조교로 일하면서 꼬박꼬박 세금을 냈기에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나야 대학원생으로서 월급이 차감된 적도 없고 오히려 집에서 자가격리를 실천하게 되면서 소비하는 돈이 적어졌지만 꽁돈은 꽁돈이다.

 

단층 이황화몰리브덴 (MoS2) 나노포어를 통과하는 DNA 모델. 2019형 3DS MAX로 모델링했다.

왜 갑자기 지원금 얘기를 하냐면, 이 $1,200이라는 꽤 괜찮은 돈으로 컴퓨터를 교체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4월 초까지 사용하던 노트북은 2017년 여름에 $800로 구매한 델의 게이밍 노트북이었는데, 인텔 CPU의 멜트다운 취약점 발견 후 보안 패치를 하면서 CPU 성능 자체가 적잖이 타격을 받았었다. 손수 메모리와 저장장치를 업그레이드했기 때문에 가벼운 작업 시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이 녀석의 주 사용 목적은 은 꼭 필요하지 않는 이상 집에서만 사용하며 무거운 작업을 돌리는 용도였기에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위 사진처럼 원자 구조를 모델링해야 할 때에는 폴리곤 수가 16,000개까지 늘어나기 때문에 렌더링은커녕 모델 자체를 수정할 때에도 지속적으로 끊김 현상이 발생하곤 했었다. 먼저 사양 비교를 위해 컴퓨터 사양을 아래에 적어 놓는다.

 

CPU: 인텔 코어 i5-7300HQ

GPU: 엔비디아 GTX 1050 w/ 4GB VRAM

RAM: 16 GB DDR4 (처음 구매 당시 8 GB)

SSD: 512 GB SATA M.2 (처음 구매 당시 미탑재)

HDD: 1 TB @ 5400 rpm

PSU: 130 W

 

3년 전 보급형 게이밍 노트북의 전형적인 사양이었기에 현재 기준으로는 사양이 좋다고 말하기는 정말 힘든 수준이다. 물론 메모리와 저장장치를 업그레이드한 덕분에 나름 쓸 만한 컴퓨터긴 했지만. 하여튼 이 녀석을 대체할 게이밍 노트북 (고사양 노트북에 게이밍이라는 단어를 단어를 쓰는 것이 싫지만 진정한 워크스테이션은 가격이 넘사벽 수준이므로 나에게는 게이밍 사양이 적합하다) 을 검색하던 도중, 어차피 들고 다닐 일이 없는 컴퓨터라면 아예 데스크탑을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발상이 떠올랐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봐도 델 노트북 역시 들고 다닐 일이 지난 1년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기왕 데스크탑을 살 거면 아예 내가 직접 조립하는 게 좋겠다는 비상한 근자감(?)을 갖고 지인에게 컴퓨터 견적을 대략 짜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 가격대는 $1,000 근처로 잡고 시작했으며 아래 사양으로 구매를 하려 했다.

 

CPU: AMD 라이젠 5 3600X

GPU: 사파이어 AMD RX 5500XT

RAM: G. Skill Ripjaws V 2x8GB DDR4 @ 3200MHz

SSD: 삼성 970 EVO 500GB NVMe

HDD: 웨스턴 디지털 블랙 시리즈 2TB @ 7200rpm

 

전체적으로 CPU 성능에 치중한 세팅이다. 라이젠 5 3600X CPU는 PCMark 벤치마크 성능비교 기준 i9-9900K와 엇비슷하며, 싱글코어 성능이 상대적으로 높아 게이밍에 적합한 동 체급의 CPU와는 달리 이 녀석은 고작 $200라는 가격대에 6코어 12스레드라 멀티태스킹이 강력한 모델이다. 동시에 GPU는 너무 많은 돈을 투자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AMD의 최신 GPU 중 최하위 라인업인 RX 5500 XT를 선택했었다. 인지도가 낮은 브랜드이기에 첨언하자면 성능상으로 엔비디아의 GTX 1060 6GB 모델이나 GTX 1660과 비슷한 기종인데, '갈 때까지 가 보자'는 마인드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CPU는 일반 사용자들에게는 상위급 성능을 보유하고 있기에 GPU를 순차적으로 업그레이드했는데, 5500 XT를 5600 XT로 교체한 견적을 잠깐 고려하다가 결국 현재 AMD의 GPU 중 최상위 라인업인 RX 5700 XT를 선택하게 되었다. 성능은 엔비디아의 RTX 2070을 압도하고 2070 슈퍼에 살짝 못 미치는 괴물이다. PCMark 벤치마크 기준 이 녀석보다 강력한 성능을 보여주는 GPU는 엔비디아의 최상위 라인업인 RTX 2080 이상의 모델과 타이탄 뿐이다.

 

결국 깔끔한 가격대의 $1,000 기준에서 한참 벗어난 $1,300 남짓 하는 견적을 짜게 되었으며, 한화로 150만원 정도의 돈을 들여 업그레이드를 하게 되었다. 왜 예상보다 돈을 더 들였는지는 아래에 적어 놓겠다. 먼저 최종 사양부터 적어 놓는다.

 

CPU: AMD 라이젠 5 3600X (올코어 4.3GHz로 오버클럭)

GPU: 사파이어 펄스 AMD RX 5700XT 8GB OC

RAM: 커세어 벤전스 LPX 2x8GB @ 3200MHz

메인보드: 애즈락 X570 스틸 레전드 Wi-Fi AX AM4

SSD: 삼성 970 EVO 500GB NVMe SSD

HDD: 웨스턴 디지털 블랙 시리즈 2TB @ 7200rpm

파워: EVGA SuperNOVA 650W G5 80+ Gold

케이스: NZXT H510

CPU 쿨러: 녹투아 NH-U14S (후면에 140mm 녹투아 저소음팬 추가 설치)

케이스 쿨링팬 흡기구: NZXT 140mm Aer F x1, NZXT 120mm Aer F x1

케이스 쿨링팬 배기구: 녹투아 140mm NH-A14 PWM x1, NZXT 120mm Aer F x1

 

부품 중 RGB가 들어간 녀석이 메인보드밖에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독특하다면 독특하달 수 있겠지만 난 컴퓨터 케이스가 번쩍번쩍이는 건 전혀 관심이 없다. GPU에도 사파이어 로고가 붉은색으로 빛나긴 하지만 그 외에는 '게이밍'이라는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반짝이는 것에 쓸데없는 돈을 사용하느니 그 돈을 컴퓨터 성능에 투자하겠다는 마인드다. 해서 CPU 쿨러 역시 AMD의 기본 쿨러인 레이스 스파이어가 괜찮은 공랭 쿨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녹투아의 고급형 쿨러에 140mm 쿨링팬을 히트싱크 앞뒤로 하나씩 달아서 (NH-U14S에는 히트싱크 전면에 쿨링팬 하나가 달려 있다) 사용 중이다.

 

조립 시작 당시 난장판.

컴퓨터 조립 자체는 딱히 어렵지 않았다. 조립을 시도하기 전 유명 테크 유튜버의 조립 영상을 참고하면서 대략적인 조립 순서를 익혀 놓았으며, 난해해 보일 수 있는 설명서 역시 읽다 보면 꽤나 직관적으로 조립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차근차근 부품마다 달려 있는 설명서를 읽음과 동시에 메신저 앱으로 지인들 중 컴퓨터에 빠삭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 몇 명과 노가리를 까며 조립을 하다 보니 조립 후 최종 부팅 검사까지 약 2시간이 걸렸으며, 그 후에는 정말로 얼마 걸리지 않았다. SSD도 연결 방식에 따라 속도가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윈도우 10 세팅이 몇 분만에 끝나고 드라이버 설치 역시 순식간에 될 때의 감격은 말이 아니었다. 속도가 빠른 것도 있었지만 직접 생전 처음 조립한 컴퓨터가 아무 문제 없이 동작하는 것이 더욱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데스크탑 본체 측면. 이쪽 벽은 강화유리라 컴퓨터에 전원이 들어와 있으면 메인보드의 RGB는 항상 켜져 있다.

데스크탑을 세팅하고 나니 새로운 장점이 눈에 띄었다. 보통 노트북은 웬만큼 하이엔드급이 아닌 이상 추가적인 디스플레이 연결이 1개를 넘기기 힘든데 (USB 3.0이나 USB Type-C 포트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많아야 2개를 넘지 않는다) 이 녀석은 GPU에 디스플레이포트 3개와 HDMI 포트 1개가 제공되기 때문에 냅다 다중 디스플레이를 설정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노트북 사용 당시에는 노트북 기준으로는 큰 편이지만 여전히 작은 15인치급 디스플레이와 추가적으로 구매한 24인치 디스플레이를 사용한 듀얼 모니터가 고작이었는데, 이제는 아래와 같이 일반적인 사람 눈에는 정신나간 수준인 트리플 모니터를 연결해 사용 중이다.

 

왼쪽 화면으로 음악을 재생하며, 가운데 화면에서 리포트를 작성하고, 오른쪽 화면에서 검색을 하거나 논문을 참고한다.

고성능 컴퓨터가 생기니 이 녀석의 성능을 어떻게든 써먹고 싶었는데,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엉뚱하다기보단 독특한 발상일까? 나는 항상 기계를 설계하고 조립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재미있어하는 편이었는데, 그걸 컴퓨터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결국 대학생 때 배웠던 Creo Parametric이라는 CAD 소프트웨어를 작업용뿐만 아니라 여가용으로도 사용하게 되었다. 취미삼아 캐드를 한다니...

 

첫 렌더링 프로젝트는 렌더링을 하는 데 사용하는 데스크탑과 주변기기를 모델링하기로 했다. 아래에서 보이다시피 아직 마우스는 그리지 못했는데, 나름 기하학적인 모양을 가진 모니터나 키보드와 달리 마우스는 곡선이 많아 살짝 난해한 면이 없잖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 녀석을 어떻게 그릴지 대략 감이 오긴 하니 시간 날 때마다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 추가적으로 렌더링을 하면서 혼자 보기는 아까운 작품(?)이 나올 수도 있으니 인스타그램에 pigeon_renders라는 부계정을 만들고 작업 현황 등을 업로드하기로 했다.

 

기존에 쓰던 노트북은?

 

이베이에서 $450이라는 가격에 팔아넘겼다. 성능상으로는 $450이라는 가격이 무색하게 꽤나 괜찮지만 (현재도 $450으로 상기한 성능의 노트북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체적인 외관과 관리 상태 등을 보았을 때 살짝 비싸게 판매한 감이 없잖아 있다. 아무튼 이 녀석을 판매함으로써 데스크탑에 사용할 예산을 조금 더 늘릴 수 있었으며, 운이 좋게도 메인보드를 주문했을 때 판매처에서 실수로 인텔용 메인보드 중 최상위 칩셋인 Z390를 탑재한 애즈락의 팬텀 게이밍 4 메인보드를 추가로 배송해 주었기에 사실상 $100 남짓의 꽁돈이 생긴 셈이 되었다. 물론 양심적으로라면 판매처에 돌려주는 것이 맞지만, 그런 '서비스'를 내가 내 시간과 돈을 들여 가며 해 줄 의무나 이유가 존재하지 않기에 이베이에서 팔아넘길 생각이다.

 

글이 길어졌는데, 이번 글은 지난 4달간 내 삶에 존재했던 변화 중 가장 큰 변화였던 컴퓨터 교체를 주제로 다루고 싶었다. 이 외에도 쓸 주제가 몇 가지 더 있는데, 천천히 생각해 보고 써 나가야겠다. 오늘의 추천곡은 검정치마의 2015년 싱글인 'Hollywood'이다. 몽환적인 분위기와 도로여행을 가고 싶게 만드는 뮤비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