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초등학교에서 사귀었던 친구들 중 한 명인 L과 SNS를 통해 연락을 하던 도중 이런 얘기가 나왔다.
나 미국에서 산지 너무 오래돼서 한국어 어눌해도 놀리면 안된다
ㅋㅋㅋ 그래, 그래도 내년에 만나면 재밌겠다, 추억팔이할 것도 많고.
추억팔이라...
그런 게 있나?
난 사실 초등학교 시절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날 괴롭혔지만 4년 후 나의 민사고 합격 소식을 듣고 자기 이름을 꼭 기억해 달라던, 좀 노는 친구였던 K, 내 주변 친구들 중 하나였지만 그닥 친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몇 명의 남학생들, 그 중에서도 꽤나 착했지만 너무나도 눈치가 없어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D, 당시 다녔던 영어학원인 청담어학원 정도. L에게는 미안하지만 L과 공유할 만한 추억은 사실상 없는 것 같다. 15년 만에 만났는데 L과의 추억팔이를 하면서 '나 그때 너 좋아했었어'라는 왕부담 중의 왕부담 주제를 꺼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외에는 내가 캐나다에 가기 직전에 L이 나에게 언젠가는 나를 공부에서 뛰어넘겠다, 뭐 이런 얘기를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설마 진짜겠어? 하는 생각도 있지만 진짜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진짜라면 좀 무서울(?) 것 같다. 중학교 즈음 내가 그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난 L이 꽤나 노력파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는 똥줄을 좀 탔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는 L에 대해서도 사실상 잊고 살았다. 처음 중학교 배정을 받을 때 난 그래도 초등학교 때 알았던 친구들이 있는 학교에 가고 싶어했었는데, 그때 마지막으로 L과 같은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L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 후에는 L을 잊은 채 중학교 3학년 때 좋아하는 여학생도 생기고 했었다. 자꾸 L을 좋아했었다는 얘기로 흘러가는데, 아무튼 중요한 점은 어렸을 때의 추억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학교 이후부터의 기억은 생생한데, 그 전의 기억은 이어지지 않고 추억의 조각들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L에 대해 얘기하던 중 한국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 중 하나인 C가 생각난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이자 소위 요즘 언어로 '여사친'이라고 불리는 사람. 한국에 있는 지인들 중 가장 거리낌없는 친구가 이 사람이다. 사실 C와도 처음에는 연락도 하는 둥 마는 둥, 대화도 이런저런 소소한 얘기들 뿐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친해지기 시작했다. 내 전 여자친구와의 마찰에 대해 징징거렸기 때문이었을까.
이렇게 가까워진 친구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언제 이렇게 친해졌지?
무엇 때문에 친해졌지?
그리고 다른 생각도 든다.
평생 갈 친구였으면 좋겠다.
물론 나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면서 남자 친구들은 남아 있을지언정 '여사친'들은 필히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지만서도, 그 전까지는 좋은 친구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야 지금 연락을 하는 녀석들은 평생 갈 수밖에 없을 만큼 친해진 친구들이라 그닥 걱정이 되지 않는다.
오늘의 선곡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힙합 그룹인 에픽하이의 2014년 앨범 '신발장'에 수록된 곡, 'AMOR FATI ft. 김종완 of 넬'이다. 'Amor fati'는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의 라틴어인데, 이 곡의 가사가 자신이 스스로 인생에 대한 답을 찾아 가겠다는 내용인 것을 생각해 보면 제목이 왜 'Amor Fati'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내가 이 곡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사 구절을 적어 놓는다.
죄없는 자는 돌 던져도 된다는 말인가
돌 던지는 건 죄가 아닌가
'공돌이의 주저리주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낼 때와 화내지 않을 때를 가려서 (0) | 2019.10.03 |
---|---|
공돌이의 작업 환경 기록하기 (0) | 2019.09.08 |
어느 중국인 방문 학생의 비극 (0) | 2019.08.15 |
늦은 밤 연구실에서. (0) | 2019.07.30 |
아무말 대잔치 (1) (0) | 2019.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