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hilosopher's Haven

어느 20대 후반 남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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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대잔치 (1)

abcdman95 2019. 7. 30. 01:58

 

제목부터가 아무말 대잔치(?)인 이유는 나도 사실 이 글에 무슨 내용을 쓸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이상 글쓰기를 미루면 한 번에 쓸 말이 너무 많아진다. 벌써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게 근 2주 전이라니.

 

그 동안 글을 못 (안?) 쓴 건 사실 이유가 있다. 핑계라면 핑계라겠지만 정말 너무 바빴다. 미국 국립과학재단에 연구계획서를 제출하는데, 물론 글쓰기는 내 지도교수가 담당하지만 실험은 모조리 내 담당이다. 게다가 연구계획서 주제를 내 프로젝트로 잡는 바람에 나 혼자 지난 세 달간 동분서주하면서 개미마냥 일했다. 물론 연구계획서는 이미 18일에 제출했지만, 바로 다음 연구계획이 잡혀 버렸다. 데드라인은 내일까지. 내일까지 이황화몰리브덴 (MoS2, 요즘 각광받는 2차원 물질 중 하나로 반도체 성질을 지닌다) 두 층을 쌓아 샘플을 만든 후 그걸 희석시킨 질산에 담가 일정한 패턴을 지니는 수많은 구멍을 뚫어야 한다. 그 구멍을 영어로는 nanopore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나노미터급 크기의 구멍이다. 바늘도 아니고 고작(?) 질산으로 어떻게 구멍을 뚫냐고 할 수도 있는데, 이론적인 내용은 일단 연구 성과부터 좀 내고 다뤄야겠다.

 

아무튼 내일까지 또 빡세게 일하고 나면 잠시 또 한숨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음 주말에는 애틀랜타에 갈 생각이다. 놀러는 아니고 여권 때문이다. 그놈의 군대 문제 때문에 작년에 만든 여권이 올해 말에 만료된다. 이미 입영연기 허가는 받아 놓았기 때문에 이번에 애틀랜타에 가면 2021년까지 유효한 여권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래봤자 내년에 한국에 들어가서 다시 여권을 만들겠지만서도. 내년에 한국에 들어가면 일단 가장 큰 관문은 병역특례이다. 지금 계획은 카이스트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군대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그럼 스펙쌓기는 대충 마무리가 되겠지 싶다. 포닥 (Post-Doctorate, 박사과정 후 1-2년간 자유롭게 연구를 더 진행하는 경우) 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할지 안 할지도 모르겠으니 논외로 치자.

 

누군가 내게 '당신은 평생 뭘 하면서 살고 싶어요?'라는 질문을 한다면 정확한 답은 잘 모르겠다. 일단 분야는 나노공학 쪽이 확실하니 됐지만 직업은 아직 미정이다. 누군가 시키는 일을 하며, 말빨이 능력보다 인정받는, 그러면서 매일같이 출퇴근하는 개미같은 삶은 살고 싶지 않다. 연구직이 더 낫겠지 싶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새로운 지식을 알아내는, 뭔가 창조적인 직업. 내가 공부를 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25년 인생의 대부분을 공부를 하거나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아 왔는데 고작 부장님이 시키는 일 하려고 그런 게 아니다. 더 유용한 일을 해야지. 어차피 취직해서 회사생활 하며 가고 싶지도 않은 회식 따위 갈 생각이었으면 대학원 올 생각도 안 했다. 민사고에 일리노이 주립대 스펙으로 만족하고 괜찮은 연봉 벌면서 지금처럼 쪼들리지도 않았을 거고.

 

박사 학위를 좇는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가끔씩 돈 걱정에 결혼 걱정(...)을 하는 게 짜증날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내 친구들에게도 항상 하는 말인데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되지만 공부는 지금 해야 한다. 돈이야 마음만 먹으면 벌 수 있다는 걸 이번 여름에 어느 정도 체감했기 때문이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으면 마이애미에서 한 시간에 10만원씩이나 받으며 해본 적도 없는 통역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민사고라는 스펙이 없었으면 유명 언론사 기자들과 편하게 연락처를 주고받을 수 없었겠지. 뭐 내 동기들 중에는 더 잘나가는 친구들도 있지만 항상 나보다 잘난 사람들과 비교하며 살 수는 없잖은가.

 

사실 한국 가면 고민거리가 여러 가지 있을 듯하다. 내년이면 나도 26살인데, 미국에서 여자친구를 사귈 생각은 없으니 한국 가서 인연을 만나야 한다. 카이스트 잘 되고 나서 여자친구도 일사천리로 사귀고 박사과정 밟는 동안 돈 착실히 모아서 결혼에 골인할 수 있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인생사가 그리도 잘 풀리던가. 사서 걱정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뭔가 대학원 가서 연구에 쪼들리며 생활하며 연애를 시작한답시고 설치기에는 내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결혼은 어떤 여자랑 하고 싶냐고? 중요한 순서대로 착하고 예쁘고 똑똑하면 된다. 아, 그리고 대학원 중에 만나는 여자면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할 것 같다. 이유인즉슨 나와 연애하는 여자라면 나와 나이차이가 나 봤자 두세살 내외일 텐데, 그럼 취직을 했거나 취직을 준비하는 입장일 것 아닌가. 취직을 이미 한 상황이면 대학원생인 나보다 당장은 수입이 많을 것이고, 취직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사실상 무직에 학생인 내가 그닥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닐 것이다. 아무튼 학벌(...)이 좋다고 해도 대학원생이라는 신분은 이미 대기업에 취직한 사람보다 매력이 떨어지겠지 싶다. 그런데도 날 믿고 만나 주는 사람이라면 당장 눈에 보이는 것보다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일 테니 내 자신을 바칠 가치가 있는 사람 아닐까.

 

정말 제목처럼 아무말 대잔치가 되었다. 앞으로도 아무말 대잔치가 더 있겠지. 내일까지 연구실적을 낸 후에 다시 아무말 대환장파티(?)를 열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