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hilosopher's Haven

어느 20대 후반 남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공돌이의 주저리주저리

늦은 밤 연구실에서.

abcdman95 2019. 7. 30. 14:02

현재 시각은 오전 12시 30분. 평소 같으면 잘 준비를 할 시간이지만 오늘은 예외다. 아직 연구실에서 실험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실험을 해 댔는데 아직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질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다. 아예 희망이 없으면 또 내일 더 이어 가야지, 하고 집에 가겠는데 그렇진 않다. 조금만 더 하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올 것 같아서 그냥 때려치고 집에 가기도 뭣하다. 내일까지 최대한 열불나게 실험을 하기로 교수랑 약속을 하기도 했고.

 

실험은 내가 하지만 결과는 이 녀석이 보여준다.

 

바쁜데 웬 블로그냐고?

 

내 실험 과정상 기다리는 시간이 꽤 많다. 지금은 원자 현미경 (Atomic Force Microscope, AFM: 미세한 바늘로 샘플의 표면을 점자처럼 읽는 현미경) 으로 스캔을 돌려 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이게 시간이 오래 걸리면 잠시 눈이라도 붙이겠는데, 그러기에는 애매하고 아예 정신줄 놓고 기다리기에는 짧은 애매한 시간이다. 그래서 글이나 쓰자, 하고 노트북을 켰다.

 

이렇게 원자 현미경으로 스캔을 하고 나면 옆에 있는 청정실 (Cleanroom: 먼지 등 공기 중의 미세 입자들의 부피당 수를 최대한 줄인 공간) 에 들어가 샘플을 희석시킨 질산에 잠시 담궈야 한다. 저번 샘플은 섭씨 40도로 가열한 10:1 비율의 질산에 10분 동안 노출시켰는데, 에칭 (Etching: 물질이 분해되는 현상) 이 너무 많이 된 듯했다. 이번에는 같은 온도와 농도의 용액에 1분만 노출시켜 볼 생각이다. 질산을 사용하는 이유는 저번에 언급한 이황화몰리브덴 (MoS2) 이 질산에 분해되기 때문이고, 그 질산을 희석시키는 이유는 반응 속도를 낮춰 에칭의 정도를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희석시킨 질산에 노출된 샘플을 다시 원자 현미경으로 스캔하면 에칭 전후의 샘플 표면을 비교할 수 있게 된다. 내 목적은 단층 이황화몰리브덴을 두 겹 쌓은 샘플의 표면에너지를 이용해 선택적 에칭을 이루는 것이다. 만약에 질산 에칭을 통해 그 목적을 이루었다면 인과관계를 증명해야 하는데, 원자 현미경으로 스캔한 샘플의 전후 비교를 통해 그 증명이 이루어진다.

 

역시나 말로는 쉽다. 말로만 쉽다...

 

지난 몇 달간 비교적 만들기 간단하지만 우리에겐 만들기 쉽지많은 않았던 그래핀 (Graphene: 흑연을 단층화시킨 물질로, 연필심으로 자주 사용하는 흑연에 비해 강도가 훨씬 높으며 전도체이다) 을 이산화규소 (Silicon Dioxide: 흔히 실리콘 웨이퍼라 불리는 물건으로 2차원 물질을 전사하는 용도로 자주 쓰인다) 웨이퍼에 전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몇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그래핀 두 장을 쌓는 것까지, 그리고 그 그래핀 두 장 사이와 샘플 전체적으로 존재하는 이물질을 제거하는 'Squeegee' 기법 (어느 정도의 경도를 지니는 AFM 바늘로 샘플에 압력을 가한 채로 스캔하면서 이물질을 '밀어내는' 기법) 을 알아내는 것까지, 게다가 그래핀으로 익혔던 모든 테크닉을 이황화몰리브덴에 적용하기까지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오래 걸릴 만한 일이 아니었을 법도 한데, 그야 물론 내가 이미 그 과정을 모두 겪은 입장이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아마 몇 달 후에 지금의 고난을 돌아보면 '아, 그 쉬운 걸 내가 왜 그렇게 어려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또 들겠지.

 

일단 지금은 빨리 일을 끝내고 집에 가서 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