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여전히 용돈벌이는 과외로 하고 있다. 처음에는 집에만 있는 게 질려서 시작했다. 물론 냅다 나가도 되지만 나가면 항상 돈을 쓰게 되니까, 아무리 미국에 있으면서 사흘 동안 통역 알바로 벌어 놓았던 150만원 남짓한 돈이 있다 쳐도 그걸로 몇 달을 버틸 수는 없잖아? 게다가 미국에서 모았던 돈은 모두 외환통장에 넣어 놓았거나 미국의 은행 계좌에 고이 모셔 두었으니 그걸 환전하기도 아까웠다.
그렇게 시작했던 과외가 하나둘씩, 천천히 늘어나더니 알게 모르게 파트타임 직업처럼 되어 버렸다. 놀고 싶어도 과외 때문에 못 노는 수준? 누가 과외 잡는 게 꽤나 힘들다 그랬었는데 셀링 포인트를 뭐로 잡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난 국내 입시 등은 아는 게 없으니 SAT나 토플 등 해외용 영어나 대학수학 등을 마케팅(??)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금 '학생'들이 모두 유학을 목표하는 중고등학생들이나 영어/수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성인들이다.
학생 1. SAT를 배우는 펜실베이니아 남고생. 서글서글하게 잘생긴 친구. 공부는 별로 안 해봤다지만 머리가 나쁘지는 않다. 단지 가르쳐주는 걸 정확히 이해하고 넘어가는지가 의문이랄까. 이해력이 모자라다는 뜻이 아니고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력을 어떻게 탄탄히 쌓는지를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해서 이 친구는 모르는 걸 가르쳐주는 걸 넘어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단어는 이렇게 외우면 좋다, 수학은 이렇게 공부해 봐라, 등등. 이렇게 말해줘도 안 할 때가 많아 가끔씩 답답하지만 결정적으로 수업 태도가 좋아서 마음에 드는 친구이다. 지금은 한국에 잠깐 돌아와서 자가격리 중이라던데, 나중에 직접 볼 기회가 생기면 맛난 거라도 사줄 생각이다. 공부 좀 하라는 잔소리와 함께.
학생 2. SAT를 배우는, 외고에 다니던 여고생. 올 가을 대학생이 되지만 나에게는 항상 아기였던 내 동생보다 한 살 어린, 그래서 마냥 귀여운 친구. 영어 실력이 특출난 건 아니지만 문제를 풀 때 하나하나 신중하게 푼다는 생각이 든다. 숙제로 내준 문제들 중 틀린 문제를 가리키며 '이건 왜 이렇게 골랐나요?' 라고 물어보면 이건 이러이러하게 생각해서 골랐는데 생각해 보니 저게 맞는 것 같다며 가끔씩은 자신이 직접 답을 찾아 버리기도 한다. 그것 외에도 단어, 그놈의 단어를 이 친구는 그래도 알아서 정리를 한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기존 단어장에 없는 단어라도 꼭 써 놓으라고 했더니 진짜로 문제를 풀 때 지문마다 모르는 단어들을 정리해 놓았던 걸 보고 기특했던 기억이 난다. 요새 유학을 준비하느라 일이 많은지 벌써 두 번이나 수업 시작하기 30분 전에 갑자기 시간을 바꾸면 안되냐고 물었는데, 그게 약간 답답한 것 빼고는 나중에 이 친구가 미국으로 간 후에도 이런저런 조언을 줄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친구이다.
학생 3. 영어/수학을 배우는 초4 남학생. 어릴 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꼬마이다. 어릴 때 내 모습이라 함은 1) 산만하고 2) 장난기 많고, 그런데 3) 똘똘하고 4) 집중력은 개판이지만 5) 순간 집중력은 뛰어나다. 내가 민족사관고를 졸업했다는 걸 보고 어머님이 연락해 주셨는데, 어머님이 아이를 보는 시선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꼬마라고 막 이것저것 시킨다기보다는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아 그 길을 터 주려 노력하시는 느낌? 그래서 꼴랑 한 시간짜리 영어 과외지만 영어를 가르치는 건 뒷전이고 공부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집중력 향상 훈련 등을 주로 한다. 그리고 그 짤막한 과외가 끝나면 어머님과 10분 정도 얘기를 한다. 궁금한 게 많으신 건지 항상 뭔가를 물어보신다. 미국에서 대학 가는 건 어떤지, 민사고를 가기 위해 어떻게 공부했는지, 한국에는 왜 왔는지, 심지어 박사는 왜 하고 싶은지(??) 등까지 물어보신다. 구멍투성이인 나지만 이분 입장에서는 젊은 친구가 목표 의식을 갖고 자신이 어떤 일을 왜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만이라도 자신의 아들이 나중에 본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신 것이겠지.
학생 4. 대학수학을 배우는 새내기 여대생. 내 동생보다 두 살이 많은 친구. 나와 6살이나 차이가 나니 학창 시절 얘기는 자제하게 된다. 성인 둘 사이에서 6살은 큰 나이차가 아니지만 학창 시절로 돌아가면 내가 고3일 때 이 친구는 초6이었던지라... 대학수학 중에서도 미적분을 가르치는데 다행히도 나에게는 쉬운 분야이다. 경제학과에서 배우는 미적분학이니 편미분을 가르치게 돼도 고난도 편미분은 아니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가르치기에 좋다. 처음에는 친하지 않으니 두 시간 내내 논스톱으로 수업만 했는데, 이젠 좀 편해져서 이런저런 사족(?)을 섞어 가며 수업을 한다. 물론 그렇게 수업 외적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난 안절부절. 쓸데없는 책임감 때문에 두 시간 동안 수업을 하게 되어 있으면 시간을 살짝 넘길지언정 짧게 끝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지라 막상 당사자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나 혼자 시간 까먹는 걸 걱정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과외는 내가 파주까지 가야 하는지라 시급을 살짝 올려서 받는데, 이 친구 입장에서는 자신이 직접 알바해서 번 돈으로 수업을 받는다. 내가 전주에 내려간 후에도 계속 수업을 진행하고 싶어하던데, 그 때부터는 어차피 원격 수업일 테니 시급을 확 낮출 생각이다.
학생 5. 관광 쪽 석사 과정 진행 중인 여학생. 김포에 사는, 나와 동갑인 친구이자 내가 가장 편한 '학생'. 수업 첫날부터 참 독특했는데, 시범수업 직후에 연락을 하시더니 발표 준비를 도와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당시 초면이었던 이 분과 몇 시간을 머리를 싸매고 발표자료며 대본을 준비한 결과 오랫동안 알았던 친구마냥 친근감이 생겼다. 이후에도 참 신기하게 수업을 더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빼는 일은 거의 없으셨고, 부득이하게 수업을 못하게 되었던 그 단 한 번조차도 취소하는 게 아닌 익일로 미루시는 등 영어 공부에 진심이신 듯 보였다. 심지어는 카톡으로 영어 질문을 정말 자주 하신다. 귀찮지 않냐고 조심스레 물어보시는데 난 워낙 심심해서... 내 입장에서는 학생이 말도 잘 통하고 열심히 하니 이것저것 도와드리기 시작했고, 드디어 종강을 맞아 그 분은 물론이고 나까지(?) 한숨 덜게 되었다. 그분은 한 학기 동안 열심히 도와줘서 고맙다며 밥을 사셨고, 난 한 학기 수고하셨다고 올리브영에서 선물을 이것저것 사서 전해 드렸다. 후에도 계속 수업을 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수업이 재밌으니 나야 좋지 뭐.
사족이지만 올리브영에서 그분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애써 고르느라 진땀을 뺐다. 마스크팩 종류는 왜 이리 많으며, 향수는 뭔 놈의 향이 이렇게 다양한 것인가! 립밤은 알겠는데 립글로스는 무엇이고, 왜 이름이 다 비슷비슷한데 살짝씩 다른 것인가! 처음 올리브영에 들어서자마자 그 생소한 다양함에 겁을 집어먹은 나는 다짜고짜 직원 한 분한테 가서 혹시 20대 중후반 여자에게 간단한 선물을 하고 싶으면 뭐가 좋을지 물었는데, 당황스러우셨을 텐데도 이것저것 친절하게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학생 6. 시청에서 근무 중이신 공무원 누님(?). 내가 예상했던 순수 비즈니스적인 과외 관계의 분이다. 내 또래 학생분들이야 수업 중에도 후에도 이런저런 사적인 얘기를 하고 가끔씩 카톡으로 수다를 떨며, 그저 '사제관계'를 넘어선 '친구관계' 느낌이 나는데 이 분은 영어 도와드리고는 끝. 아무래도 신나게 갈려나가는 공무원답게 일이 바쁘시니 수업을 하면 하는 거고 안 하면 안 하는 느낌으로 편할 때 연락 주시라고 얘기해 놓았다. 그래도 수업하면서 영어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역시 공무원이 고생하긴 고생하는구나 싶었다.
전주에 내려가게 되면 나에게는 1, 2, 4, 5번 학생들이 남겠지 싶다. 1번은 애초부터 원격 과외였으니 쭉 비대면으로 가면 되고, 2번은 미국 가게 돼도 수업은 계속 하게 될 생각인 듯하다. 4, 5번은 구체적인 얘기까진 안 했는데 아무튼 내가 전주로 내려간다고 해서 과외를 끊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사실 난 집에서 나가고 싶어서 과외를 하는 만큼 대면 과외를 선호하긴 하는데, 그건 전주 가서 상황을 봐야겠다. 일단 이 과외 덕분에 일상이 단조로울지언정 심심하진 않고, 사진 등의 취미도 즐길 수 있으며, 심지어 자동차도 차값 빼고는 모조리 직접 부담할 수 있다.
장황하게 똥글(?)을 썼는데 왜 썼는지는 모르겠다. 노래나 듣자. 임창정의 '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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