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hilosopher's Haven

어느 20대 후반 남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공돌이의 주저리주저리

사진은 왜 찍어요?

abcdman95 2021. 6. 3. 00:14

요새 워라밸이라는 말이 꽤 핫하다. 워크-라이프 밸런스의 약자로, 일과 인생의 균형을 잡는다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일에 파묻혀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개념이기도 하겠다.

난 어떨까?

나에게 일은 연구이다. 내가 지난 5년 간 몸담았던 나노공학 분야와 관련된 모든 것이 나의 '일'이다. 뭐 지난 3년은 95%를 일만 하면서 살았으니 어떻게 보면 내 '일'이자 '인생'이었지. 나노공학은 나에게 있어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시작한 분야는 아니었지만, 시작하고 보니 특별해진 분야였다. 지금 돌아봐도 전공 하나는 참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공대 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 잘 어울리고, 최첨단 중에서도 최첨단 기술을 개척하는 분야이고, 심지어 정신줄 놓고 있다가는 심하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을 정도로 (물론 바보가 아니고서야 나노공학 실험을 하면서 정신줄을 놓지는 않겠지만) 나름 위험하기까지 하다.

나에게 라이프, 즉 일과 관련없지만 나에게 가치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대학원 때는 운전이었던 것 같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운전대를 잡고 음악을 들으며 전방을, 가끔씩은 룸미러를 주시하는 그 순간이 좋았다. 그게 연구실을 가기 위한 운전이었더라도, 나에게 운전은 자유를 상징했다. 내가 친구에게 지나가는 말로 했던 것처럼, 난 내 자동차와 신용카드만 있으면 이 광활한 미국 땅에서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난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하리만치 운전을 좋아했다. 그것도 주변이 보이지 않고 오롯이 내 앞에 놓여진 도로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을 더더욱 좋아했다. 같은 맥락에서 난 야간 운전을 참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가로등조차 없을 정도로 외딴 곳에서의 야간 운전을 좋아했다. 뭔가 당시의 내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미국 141번 국도를 운전하며 찍은 영상. 휴대폰으로 동영상 녹화를 시작한 후 거치대에 고정시켜 촬영했다.>


그래서 난 마지막 초장거리 도로여행이랍시고 그레잇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에 가기 위해 편도 12시간짜리 운전을 한 날에도 애틀랜타에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야밤의 국도를 즐기고 싶어서. 지금은 6개월째 운전대를 안 잡았지만, 위 영상을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대학원 생활은 그립지 않지만 운전을 하던 저 순간만큼은 그립다.

그렇게 3년 간 나의 '라이프'였던 운전을 뒤로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내게 새로운 '라이프'가 되어 준 것은 사진이었다. 돈이 없어서 카메라를 살 수 없었던 나에게 유일하게 멋진 사진을 찍을 만한 수단은 휴대폰 카메라였지만, 요새 폰카가 아무리 좋아졌다 한들 오로지 사진을 찍기 위해 만들어진 카메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렇게 사진에 대한 로망만 품은 채 그를 버킷리스트에 올려 놓고 '존버'를 하던 나에게 뜬금없이 아빠의 DSLR인 캐논 EOS 550D가 주어졌고, 노출의 3요소라는 조리개/셔터스피드/감도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카메라를 풀수동 모드(!)로 놓은 채 조리개를 열면 이렇게 되는구나, 셔터스피드는 이럴 때 바꾸는구나, 감도는 이럴 때 높이는구나 등을 익혔다. 어떻게 보면 야매로 사진을 익혔지만, 그렇게 연습을 조금 하고 나니 이제 내가 원하는 심도의 사진은 어렵지 않게 찍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DSLR 한 대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은가.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카메라가 된, 그리고 할아버지의 필름 카메라였던 니콘 FM2를 수중에 넣게 되었다. 그것도 범용성 좋은 50mm f/1.4 단렌즈뿐만 아니라 35-70mm f/3.5 줌렌즈와 70-210mm f/4.5 망원 렌즈, 그리고 다양한 컬러필터와 클래식 플래시까지. 안 그래도 레트로 감성을 좋아하는 나는 바로 필름 카메라에 빠졌고, 이제는 첫 롤을 뽑은지 몇 달도 되지 않아 다양한 필름카메라 브랜드와 필름 종류, 심지어 현상소 정보까지 제한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다양한 필름카메라를 써 보고 싶다며 두 번째 필름카메라이자 세 번째 카메라인 소련제 1971년식 조르키 4를 구매하였고, 이 역시 잘 쓰는 중이다.

대학원에 다닐 당시에는 여윳돈이 많지 않아 취미 생활에 돈을 쓰는 게 사치였다. 다행히도 지금은 의식주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 취미 생활에 돈을 여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난 필름카메라라는 취미에 50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하게 되었다. 물론 그 중 새로 영입하게 된 카메라 두 대를 정비하느라 쓴 돈이 75%가 넘기는 하지만 아무튼. 초기에는 연습한답시고 아무거나 찍어 보았지만, 요즘은 사진 한 장 한 장을 찍을 때 많이 신중해진 감이 없잖아 있어 일주일에 한 롤 태우기도 버거운 수준이다. 필름 한 롤을 찍고 현상하는 데 드는 돈이 약 15,000원 정도 하는데, 이 정도 속도라면 교통비 포함 한 달에 10만원도 채 들지 않는 저렴한(?) 취미생활이 되는 것이다. 물론 장비에 돈을 들이지 않을 경우이지만, 앞으로 추가하고 싶은 장비라면 DSLR에 쓸 15만원짜리 망원렌즈 정도 뿐이니 뭐.

그래서 난 왜 사진을 찍을까?

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내가 운전을 좋아한 이유랑 같다. 난 사진을 찍으러 갈 때 항상 혼자 나가는데, 주변에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없기도 하거니와 내가 좋아하는 일을 같이 할 만한 사람도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혼자 나가면 물론 외롭지만(...) 마음이 평화로워지기도 한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위치를 잘 잡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되며, 그렇게 힘들게 찾아간 곳은 예상대로 아름다운 곳이 많다. 그렇게 아름다운 위치를 잡으면 카메라를 눈에 들이대는데, 구도를 잡고 초점을 잡은 후 셔터속도와 조리개 다이얼을 돌리며 원하는 심도와 노출이 나오도록 카메라를 설정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셔터를 누를 때는 몇 초간 숨을 참는다.

그 과정이 좋다. 나만의 눈으로 나만의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담을 수 있어서. 그리고 필름 카메라의 경우 필름을 애지중지 보관해 놓았다가 현상소에 맡긴 후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그 설렘이 좋아서. 사진을 찍을 때 이 사진은 잘 나왔겠다, 이 사진은 별로인 것 같다, 등의 느낌이 오는데 신기하게도 그 감이 항상 맞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좋다. 망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진이 의외로 좋을 때도 있고, 처음 봤을 때는 별로라고 생각했던 사진이 다시 보니 정말 마음에 드는 경우가 있어서. 아래 사진도 그랬다. 처음 봤을 땐 '아 망했군' 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의외로 역광에 소나무의 윤곽만 보이는 게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느껴져서 마음에 들었다.

 

Nikon FM2, Kodak ColorPlus 200


사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을 수 있는 방식이다. 그래서 난 내가 아끼는 사람들의 사진도 찍어 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아빠의 사진도 찍었고, 내가 지난 8년간 친하게 지낸 고등학교 선배의 사진도 찍었고, 과외 학생으로 만났지만 나에겐 그 이상의 존재인 김포의 어느 한 분의 사진도 찍었다. 내가 그 사람들을 아끼는 만큼 정성스럽게.

이 순간만큼은, 네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야.

오글거리는 멘트지만 난 인물 사진을 찍을 때 그렇게 생각한다. 한 장 한 장 영혼을 쏟아, 그저 사람을 사진에 담는 것이 아닌 내가 손톱만한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과 내가 찍으려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어울릴지 고민하며 화각과 구도를 조절한다.

 

Nikon FM2, Kodak Ultramax 400


나중에 친구들을 만날 일이 있어도 카메라는 꼭 챙겨 갈 생각이고, 여자 친구가 생기게 된다면 여자 친구가 가져오지 말라고 하지 않는 이상 항상 내 어깨에는 카메라가 걸려 있을 예정이다. 일만 하느라 보낸 3년의 시간만큼 다른 사람들과 보내는 짤막한 시간의 조각 하나하나가 나에겐 소중하고, 그 값진 순간들을 더욱 가치 있게 담아 내고 싶기 때문에. 여자 친구도 영혼을 갈아넣어 사진을 찍어 줄 생각이다. 사진 그 자체가 내 버킷리스트에 있었던 것처럼, 여자친구의 인생샷을 찍어 주는 것 역시 내 버킷리스트에 올라와 있다. 그렇게 난 내 카메라를 그저 나만의 취미생활이 아닌, 내 자신과 나에게 소중한 모든 사람들의 소중한 순간을 담아 주는 매개체로 사용하고 싶다. 폰카의 압도적인 편의성 때문에 사진의 가치가 가벼워진 듯한 요즘, 그냥 버튼 하나 누르면 '괜찮은' 사진이 나오는 요즘, 내가 FM2와 조르키 4를 사용하며 순수 기계식 수동카메라를 고집하는 이유이다. 사진 한 장 한 장의 모든 것을 내가 직접 조절하면서 나만의 색깔을 담아 넣을 수 있어서. 노출이 안 맞아도, 초점이 약간 어긋나도 그건 어쨌든 내 마음이 담긴 사진이니까.

이렇게 적으니 내가 무슨 전문 사진가라도 된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는데, 아직 난 갈 길이 멀다. 그저 사진에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고.

나중에 엄마와 동생이 한국에 놀러 오면 카메라로 사진을 많이 찍어 놓고 싶다. 여자친구가 생기면 또 셔터 버튼을 신나게 눌러 댈 생각이고.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역시 '야 잠깐만' 하며 함께하는 그 짤막한 시간을 기록하고 싶다. 나중에 돌아보면 그게 나만의 추억이고, 그들만의 추억이 될 테니까.

오늘의 추천곡은 검정치마의 'Everything'. 몽환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명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