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hilosopher's Haven

어느 20대 후반 남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일상이야기

우울한 날이다.

abcdman95 2019. 9. 10. 12:47

오늘은 내 멘탈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약간 감이 오는 날이었다.

 

연구 계획대로라면 아침에 라만 분광기로 탄소 입자의 라만 스펙트럼을 분석한 후 오후에는 단층 MoS2을 만들기 위한 첫 작업인 전자빔 증착장비 (e-beam evaporator, 전자총을 사용해 원하는 면적에 몇 나노미터-마이크로미터 두께의 금속 막을 입힐 수 있는 장치) 를 사용해 다층 MoS2가 준비된 실리콘 웨이퍼에 40nm 두께의 금을 입히는 작업을 할 예정이었다.

 

머피의 법칙이라던가, 일이 꼬이려면 모든 일이 깔끔하게 꼬여 버리는 것을.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1400 cm-1과 1600 cm-1 부근에서 선명한 신호가 보여야 했을 탄소 입자 샘플에서는 무슨 이유였는지 1400 cm-1 신호만 보였으며, 전자빔 증착장비로 금박을 씌운 (씌우려 했던...) 샘플은 막상 꺼내고 보니 내가 연금술사가 된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영롱한(?) 은색의 박막이 씌워져 있었다. 내일 연구실 동료와 함께 이 샘플에 씌워진 금속 막의 정체가 정녕 무엇인지 알기 위해 EDS (energy dispersive spectroscopy, 에너지분산형 분광분석법) 시험을 해 볼 생각인데 일단 지금은 도대체 뭐가 씌워진 건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보통 그 장비에서 많이 사용하는 금속이 티타늄인데, 그럼 구석구석 남아있던 티타늄이 씌워진 건가?

 

하여튼 나름 잘 되겠지 싶었던 실험이 망가져 버리니 오후 5시경에는 의욕이 떨어져 시무룩하게 있었다. 얼마 안 지나 실험 망쳤다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일어나 다음 작업을 시작하긴 했지만 지금도 이상하게 우울하다. 자신감이 떨어졌느냐... 그건 아니다. 전자빔 증착장비는 애초에 사용법을 정확히 숙지하지 못한 장비였으며 금박을 입히는 작업 역시 이 장비로는 처음 하는 작업이었다. 근데 뭔가 일이 잘 안 풀린다는 생각이 들자 쉽게 떨쳐지지가 않는다.

 

우울증인가?

 

아닌가?

 

뭐 이렇게 징징거려 놓고서 내일이면 괜찮아지겠지만서도, 이렇게 뜬금없이 우울해지는 걸 보면 멘탈이 많이 약해지긴 한 것 같다. 속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없다는 건 꽤나 슬픈 일인 것 같다. 물론 그것도 마음 속에 어둠이 존재해서 그런 거지만.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연애하고 싶다. 내년 여름까지는 안 할 생각이지만 하고 싶긴 하다. 여자가 좋아서, 뭐 이런 생각이라기보다는 서로의 삶에 서로를 1순위로 둘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해서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가끔씩 괜찮은 글이 올라오는 민사고 대나무숲에 그런 글이 올라왔었다.

연애하고 싶어요.
단순히 그냥 외로워서 그런게 아니라
이 곳에 갇혀 지내면서
사람 향이 그리워지며
누군가 나를 아끼고 있음을
누군가 내가 아낄 수 있음을
누군가 나의 슬픈 모습까지 사랑해줄 수 있음을
다시금 느끼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쓴, 누군지 모를 이 후배는 지금 횡성군 덕고산 중턱에 있는 12층짜리 하얀 건물에서 3년간 생활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참 웃기게도 내가 비슷한 처지이다.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제한된 수의 사람을 만나고,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주변 사람들과는 제한적인 관계를 맺고 산다.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되 아끼지는 않으며, 슬픈 모습은 절대 내비치지 않는다. 센 척을 한다기보단, 내 주변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쳐 놓고 나도 그 밖을 나가지 않으며 다른 사람도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동물로서 사회 활동을 함에도 사교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죽하면 내가 스스로를 가리키는 표현이 'sociable but not social' (사회적이나 사교적이지 않음) 일까.

 

그래서, 그래서 연애를 하고 싶다.

 

사실상 8개월 정도만 기다리면 귀국을 할 텐데, 내년 여름이 제일 고비이겠지 싶다. 일이 잘 풀리면 전문연구요원을 하게 되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군대를 가거나 다시 박사 과정 준비를 해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훨씬 더 힘들고 우울해도 되니까 내년에 전문연구요원 문제만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주제에서 벗어난 일상 이야기를 첨언하자면, 어제 오랜만에 운동다운 운동을 했다. 중량은 50파운드 (약 23kg) 로 통일한 후 평소에 하던 세트당 12회 3세트에 약간 변화를 주어 세트당 16회 4세트로 등, 어깨와 가슴 운동을 했다. 그 후에는 약 2시간 가량 배드민턴을 쳤는데, 여름 내내 배드민턴을 칠 기회가 없었다 보니 실력이 좀 줄어든 게 느껴졌다. 아무튼 오랜만에 빡세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더니 예상대로 어제 운동한 부위가 신나게 욱신거려 주신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이해할 이 만족스러운 욱신거림이 좋아 규칙적으로 운동을 할 생각이다. 근육돼지가 될 생각은 없지만 어깨가 조금 더 넓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략할 생각이다. 다행히도 학부생 때 운동을 하며 기본적인 몸은 만들어 놓았으므로 운동량만 유지하면 될 듯하다.

 

오늘의 추천곡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힙합 그룹 에픽하이의 2017년 앨범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에 수록된 명곡 '빈차'이다. 추가로 가사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적어 놓는다.

내가 해야 할 일
벌어야 할 돈 말고도 뭐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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