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hilosopher's Haven

어느 20대 후반 남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일상이야기

2019년 6월 25일. 오랜만에 글을 쓴다.

abcdman95 2019. 6. 26. 13:02

살면서 소소한 일들을 기록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 정작 컴퓨터 앞에 앉으면 '어차피 내 머릿속에 있는 기억인데 굳이...?'라는 생각이 들어 계속 딴짓을 하곤 했다.

근데 그래도 몇 년 전에 찍은 사진이 휴대폰에 담겨 있는 걸 보고 행복한 기억에 잠기는 것처럼, 나중에 이 글을 읽으면서 '맞아, 나도 그랬었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며 억지로(?) 글을 쓴다.

 

보니까 마지막으로 작성한 글이 2017년 9월이었던데, 내용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9월 15일이라... 당시는 그저 썸을 타는(?) 정도의 사이였던 여자를 만나러 가기 직전이었다. 오래 사귀지는 못했다. 어차피 시작부터 장거리인 연애였고, 성격도 잘 맞지 않아서.

 

그 후 18년 상반기에는 또 다른 여자를 만났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난지라 굳이 이성관계로 발전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결국 같은 해 중순, 학부를 졸업할 때까지 친구로 남았다. 졸업할 때 어차피 앞으로 못 만날 것 같아 사진 정도는 같이 찍고 싶었는데, 작별 인사는 하지 않겠다며 만나 주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평생 모를 것 같다.

 

18년 여름에는 한국에 갔었다. 14년에 처음 혼자 미국에 온 이후 처음 가는 한국이라 뭔가 생소했다. 마치 내가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그러면서도 뭔지 모를 감동도 있었다. 왜 독특한 감동을 느꼈는지는 후에 서술한다.

 

한국에서의 1달은 힘들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좋았다. 고등학교 때 나름 가까웠던 친구 2명과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만 그닥 친하지는 않았던, 그리고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었던 친구를 만났다. 고등학교 때는 내가 약간 띨(?)했던 시절이라 그 시절 사귄 친구들도 마냥 편한 친구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중학교 동창 친구는 그 반대로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너무나도 편하고 좋았다. 내 불편한 과거를 모르는 사람이어서였을까.

 

대학원은 혼자 힘으로 가기로 했다. 그만큼 돈이 필요했으니 한국에서 알바를 하는 건 당연지사였고, 마침 모교인 민족사관고에서 방학 때마다 하는 영어캠프인 GLPS에서 강사를 구한다고 하길래 그 자리를 미리 맡아 놓은 상태였다. 오랜만에 내가 속 참 많이도 썩여 드렸던 은사님들도 뵙고 사감 선생님께도 인사드릴 기회라 괜찮은 일자리였다. 돈도 3주간 300만원이면 꼭 나쁜 것만도 아니고.

 

고등학교 때는 미소지으시는 모습을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셨던 사감 선생님이 제일 반가웠다. 그나마 미소지으실 때는 스승의 날이나 어버이날 때 학생들이 깜짝선물 아닌 깜짝선물을 해 드렸을 때. 내가 졸업한 지도 벌써 5년차고 그 동안 수많은 학생들을 봐 오셨을 텐데, 날 보시자마자 정말 환한 웃음을 지으시는 걸 보고 놀라면서도 반가웠다. 두 번째 아버지를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 느낌이랄까.

 

캠프 자체는 꽤 재미있었다. 벌써 민사고 기수가 20기가 넘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굳이 얼굴도 본 적 없는 후배들과 친해질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내가 새파란 고등학생이었을 때 계셨던 선생님들을 뵙는 게 좋았을 뿐. 아이들도 참 제어가 안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나와 잘 어울려 주었다. 초등학교 5-6학년이면 아직 아이 티가 나면서도 어느 정도 개념이 생기는 나이인데, 농담조로 얘기한 거지만 아이들이 순수하면서도 착하더라. 너무 말을 듣지 않을 때 여러 번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는데, 미숙한 선생과 3주간 에어컨도 잘 되지 않는 곳에서 너무나도 밝게 생활한 아이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선생님들 눈에는 내가 많이 변한 모습이 보인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어울릴 생각은 안 하고 목표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살았는데, 그리고 그게 너무 후회가 되어서 학부 때는 어딜 가도 친구가 있을 정도로 사회성을 길렀는데, 그게 내 자신은 잘 몰라도 남의 눈에는 잘 보이는 듯했다. 대학 원서 작성을 도와 주셨던 선생님이 그러셨다. 많이 변했다고. 예전에는 말도 안하고 조용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너무 좋다고. 한편으로는 고등학교 때 얼마나 내성적이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 지금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18년 하반기, 대학원 생활은 마냥 쉽지는 않았다. 학부 때처럼 학생인 것은 같지만 하는 일이 너무 달라서, 그리고 내 스스로도 뭘 어떻게 열심히 해야 하는지 몰라서 헤맸다. 다행히도 지도교수는 괜찮은 사람이라 어떻게든 또 한번 달라진 사람이 되어 갔고, 1년 동안 또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해진 느낌이 든다. 물론 갈 길이 아직 멀지만.

 

18년 11월, 추수감사절 때에는 나와 꽤 친해진 중국인 친구와 디즈니월드를 갔다. 총 인원은 5명. 그 친구 (A)와 그의 친구 (B), 친구 A의 아내, 그 아내의 친구이자 피아노 선생님인 어느 여자 (C), 그리고 나. A의 아내는 내가 정말 괜찮을 사람처럼 보인다며 자기 친구 C와 엮고 싶어했다. 난 예의상 받아 주었지만 C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후에도 C는 계속 나에게 연락을 했지만 나는 어장관리를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여지를 눈꼽만큼도 주는 것을 싫어해서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는 표현을 계속했다. 결국 C는 포기했고, 난 다시 마음의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 부담될 줄이야.

 

며칠 전에는 오랜만의 휴가를 즐겼다. 사실 휴가 겸 비즈니스트립이긴 했는데. 원체 대학원생이 항상 돈이 궁하다 보니 이번 '휴가'는 반가운 기회였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디플로마 탐사보도인가 뭔가를 온다는데, 그 연수를 오는 팀에서 통역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단다. 영어 의사소통은 자신있는 분야이기도 했고, 시급도 무려 10만원이라는데 거절하면 실례지. 연수 전체는 약 2주 가량이었지만 연구 스케줄을 너무 비우고 싶지 않아 마이애미에서의 일정만 소화하기로 했다. 그래도 3일간 최소 100만원이면 이득이었다.

 

도로여행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런 설렘은 오랜만이었다. 허구한 날 동네만 돌아다니다가 5시간 가량의 장거리운전을 한다 하니 마냥 좋았다. 일요일 오후 2시쯤 출발해서 자주 멈춰 주변 구경도 하고,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에서는 41번 국도가 개설되기 전에 존재했던 비포장도로를 타고 2시간 가량 오프로딩도 했다. 전륜구동 세단으로 오프로딩이라니. 그 길을 타고 나니 재미는 있었지만 오후 10시경 호텔에 도착한 차 꼴은 말이 아니었다.

 

통역 자체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작정 영어와 한국어를 잘한다고 통역을 하는 게 아니고, 그것도 테크닉이 필요하더라. 첫날에는 주제 자체가 생소한데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노트패드와 볼펜만 달랑 들고 가서 고생깨나 했다. 그렇게 한 번 데이고 나서는 밤 늦게까지 기사 공부를 하다 잤더니 도움은 되었다.

 

그 후에는 일상으로 돌아와 평범하게 바쁜 생활을 하는 중이다. 7월 중순까지는 꽤나 바쁠 듯한데, 그 후에는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생활 외에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딱히 문제는 없다.

 

물론, 문제가 없다뿐이지 정신적으로 힘들긴 하다. 평생 딱히 누구에게 속마음을 편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어서일까. 가족에게도 힘들다, 하기 싫다, 하고 싶다, 그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 근데 또 그런 생각도 든다.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은데 나 혼자 약해빠진 건 아닐까. 아니면 나만 그런 건데 그 외로움이 내 마음 속에서 썩어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괜찮은 척하는 건 아닐까.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는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고, 고등학교 때는 가족과 떨어져 기숙사에서 살았으며, 학부 때부터는 아예 독립해 미국에서 혼자 살았다. 지금은 한 술 더 떠서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독립해버린 상태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싫지는 않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내 능력으로 거머쥔 기회가 꽤 많고, 앞으로도 언제든지 발전해 나갈 나니까. 근데 그래도 외로운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예전에는 금요일 밤에 집에 오면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견디기 힘든 갑갑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제발 우울증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다행히도 원체 내가 낙천적인 성격이라 덜 힘든 듯하다. 힘들어도 그걸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사람이라.

 

빨리 행복해지고 싶다. 지금은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은, 그저 감정적으로는 무감각한 상태니까.

 

이런 얘기를 하면 속물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난 가끔 다른 사람들이 부럽다. 평범하게 취업을 고민하고 연애를 하고 친구들과 술 마시며 놀고. 난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학부 때 썸을 타던 여자와 고작 한다는 짓이 카페에서 같이 GRE 공부를 하는 것이라니, 웃기지 않은가. 그래서 한국 가면 다시 만날 그 중학교 동창 (D)에게 소개팅을 해 달라고 했는데, 반쯤 농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러면 외로움이 좀 가시지 않을까 한다. 아니면 연애를 못하더라도 D처럼 멋진 친구를 한두 명 더 사귀고 싶다.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던데, D는 정말 소중한 친구다. 물론 그 친구에게는 술을 마시지 않는 이상 이 얘기는 못 하겠지만.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말도 너무나도 잘 통하고 개념도 박혀 있는 친구다. 쉽게 내 주변 남자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주기 아까울 정도로.

 

친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에는 초등학교 동창 한 명과도 연락이 닿았다. 어느 날 갑자기 혹시 D처럼 내가 어렸을 때 친했던 친구들이 SNS에 있지 않을까 해서 D의 친구 목록을 훑어보던 중 들어온 그의 이름. 사실 말을 걸 생각은 없이 나중에 연락하게 되면 하지, 라는 생각으로 친구추가를 눌렀는데 먼저 연락이 왔다. 다행히도 그 친구 (E)도 나를 기억하더라. 사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E는 어렸을 적 나의 기억으로는 꽤 멋진 사람이었다. 나와 함께 내 초등학교에서 나름 공부 잘하는 그룹에 끼어 있었는데, 그때 내가 영어 학원에서 반배정을 가장 높은 레벨을 받았었나 보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 캐나다에 가기 직전에 E가 나한테 말했다더라. 언젠가는 날 꼭 이길 거라고. 난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어머니가 그 얘기를 해 주셨다. 뭐 그런가 보다.

 

그 외에도 E는 당시 나에게는 좀 특별한 사람이었다. 후에 대학생이 되어 '응답하라 1994'를 본 나에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이랄까. 그 때는 내가 E를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하도 오래된 일이라 자세히는 기억도 안 나지만, 학교에서 있었던 일 한두 개는 기억이 난다.

 

첫째는 좀 유치하다. 그 나이의 남자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급식에 방울토마토가 나왔었는데, 그걸 입에 넣었다가 빼서 E에게 먹으라고 줬었다. E는 아무 것도 모르고 먹었는데, 그걸 갖고 나와 내 옆에 있던 친구가 놀려 댄 거다. 화를 낼 만도 한데, E는 참 착하게도 그냥 웃어 넘기더라. 어렴풋이 남아 있는 초등학교 때의 추억으로도 E가 착하기는 정말 착했다는 기억은 선명하다.

 

둘째는 그나마 덜 유치하다. 수업 중이었고, E와 나는 짝이었다. 무슨 과목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자리는 기억이 난다. 교실 맨 왼쪽, 창가 근처. 좋아하는 E가 옆에 있으니 집중이 될 리가 없지. 도대체 내가 어떤 정신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난 그때 당돌하게도 슬쩍 E의 손을 잡았었다. 오히려 지금의 나보다도 당돌하게 말이다. E는 그때 가만히 있었다. 수업에 너무 집중하느라 눈치를 못 챘거나, 눈치를 챘는데도 손을 확 빼면 내가 무안할까봐 그냥 가만히 있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난 그때 후자라고 생각을 했었다. 결론은 이 기억에서도 E는 착했다는 것.

 

지금은 간간이 연락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너무 오래된 인연이라 그런지 다시 친구가 되긴 힘들 것 같기도 하다. E는 지금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는데, 멋진 직업이지만 역시 너무나도 힘든 직업이라 요새 꽤 지친다더라. 더 친했으면 영양제라도 사서 보내줄 텐데, 아직 그럴 사이는 아니다. D처럼 언젠가는 친해지지 않을까. 물론 E가 나와 친구가 될 생각이 없다면 말짱 꽝이지만, 주변 사람들 말로는 내가 친해지기 쉬운 사람이라던데.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년에 한국에 들어가면 한 번 봐야겠다. D처럼 편한 사이가 되면 좋겠다.

 

2017년 9월부터의 얘기를 짧게 쓰려 했는데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앞으로도 며칠에 한 번씩 글을 쓰면 좋을 것 같다. 가끔씩 집을 청소하는 것처럼 머릿속의 어질러진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듯이. 아직 못 다 한 얘기가 있는데, 다음 글에서는 그걸 적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