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hilosopher's Haven

어느 20대 후반 남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일상이야기

적절한 관심, 적절한 무관심

abcdman95 2023. 5. 14. 00:16

오늘 가족과 카페에 갔다. 집에서 다소 거리가 있지만 산골짜기 속에 위치하며 큰 저수지를 바라보는, 전망 좋은 카페인지라 꼭 데리고 가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이번 글은 그 카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내용이다.

 

자리를 잡고 가족과 대화를 하다가 가족사진을 한 장 찍어보기 위해 삼각대를 가지러 차에 잠시 다녀오는데, 카페에 다시 들어가려고 보니 정문 앞에 어떤 작은 꼬마가 허리를 90도 숙이고 서 있었다. 자세가 묘하길래 자세히 보니 뭐가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토하는 건가...? 아니, 토는 아니었다. 액체와 건더기가 섞인 느낌이 아니었다.

 

더 자세히 보니 피였다. 얼른 다가가 보니 아이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것도 보아하니 방금 흘리기 시작한 게 아니고 최소 몇 분은 그러고 서 있었던 것 같았다. 다친 건 아닌 것 같고, 으레 어릴 때 뜬금없이 터지는 코피인 듯했다. 계속 피를 흘리고 있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아이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후 후다닥 화장실에서 휴지를 뽑아 접어서 아이에게 전달해 주고 부모님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카페 직원에게 정문 바닥에 아이가 코피를 흘렸으니 청소가 필요할 것 같다고 알려드리고 마무리를 지었다.

 

당시에는 마음이 급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열이 받아서 글로 적어 두려 한다.

 

인적이 드물지 않은 카페 정문에서, 겉모습만 봐서는 끽해야 초등학교 저학년밖에 되지 않은 작은 꼬마아이가 코피를 줄줄 흘리며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으면, 누구든 도와줄 생각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시 카페에서는 마침 젊은 여성 무리가 나오고 있었다. 얼굴을 제대로 볼 생각은 안 했기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힐끗 본 옷차림대로라면 20대 초중반 정도 된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은 내가 행동을 하기 전까지 아무 것도 안 하고 보고만 있었다.

 

왜?

 

혹시나 손에 피가 묻을까 무서워서?

 

그냥 피를 보고 뇌정지가 와서?

 

아니면 굳이 끼어들고 싶지는 않아서?

 

자신들 말고 누군가가 와서 해결하겠지 싶어서?

 

어처구니가 없었던 건, 내가 그 아이의 코피를 닦아 주고 그 아이가 마침내 안도를 했는지 내게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동안(생각해 보면 그 나이대의 아이가 그런 상황에서 감사하다고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무리는 구경거리가 끝났다는 듯 내 바로 앞에서 예쁜 척 사진이나 찍고 있었던 것이다.

 

요새 남을 도왔다가, 아니면 도우려 했다가 괜히 인생이 피곤해지는 일이 종종 생긴다. 길바닥에 지갑을 주워서 경찰서에 맡겨 뒀더니 절도 혐의로 조사를 받으라고 불려갔다던지, 등등. 그래서 이제는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신경 끄는 게 답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게 얼마나 비겁한 말인가. 코피를 흘리고 있는 아이를 눈앞에 두고 내가 귀찮아질 걸 걱정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건가? 진심으로?

 

난 남한테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못한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내가 남을 도움으로써 그 사람이 얻는 것이 내가 잃는 것(시간이라던지, 돈이라던지, 등등)보다 크고, 그 사람이 내가 도울 가치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고민 없이 도움을 제공한다.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게 내게 이득이라서가 아니고, 그냥 그게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시민적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소위 상대방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너무 가깝지 않게, 하지만 동시에 너무 멀지도 않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요청할 수 있도록 적절히 가까이, 하지만 내 존재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적절히 멀리.하지만 아까의 그 무리는 그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건지, 오늘 내가 본 건 그저 무관심이었다. 매정한 무관심. 비겁한 무관심. 똥물 튈까 무서워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모른 척하는 것처럼 모자란 행동이 어디 있어?

 

그 꼴을 보고 하도 열이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약간 격앙된 말투로 글을 썼다. 오늘의 추천곡은 Bon Jovi의 'Seat Next to You'. 잔잔한 노래라도 들으면서 진정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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