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불타고 있다.
아니, 말 그대로 불타고 있다. 약 한 달 전 얘기이긴 하지만, 이곳 상황이 여전히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아마 한국에서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은 유명할 것이다. 2020년 5월 25일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시에서 중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진압 끝에 결국 사망한 사건으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미국 국민들의 스트레스와 몇십년간 이어져 오던 인종간 갈등이 한번에 폭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영향은 상당했고, 미니애폴리스는 경찰이 모두 도망가 버려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며칠간 유지되었다고 한다. 타 지역 역시 순식간에 시위가 확대되어 미국 내 대도시의 대부분은 대규모의 시위가 벌어졌고, 일부 시위대는 폭동까지 일으키며 혼란을 야기했다고. 그 와중에 미국 대통령이라는 놈은 트위터로 눈치 없는 소리나 하고 있고...
내가 살고 있는 플로리다 주 탬파 시 역시 이틀간 개판이었다. 난 겪어본 적도 없는 1992년 LA 폭동이 다시 일어나는 것 같아 생전 안 하던 긴장을 했다. 실제로 내 집에서 10분가량 떨어진 곳에서는 주유소가 불탔고, 내 집에서 5분가량 떨어진 상가 단지(?)에서는 경찰과 시위대가 몇 시간 동안 대립하며 최루탄과 폭죽(???)을 터뜨려댔다. 책상에 앉아 경찰 라디오를 수신하며 정황 파악에 열을 올리며 유튜브 라이브로 신문사 드론이 촬영하는 시위 현장을 시청했고, 트위터에 몇 분 단위로 올라오는 신문사 트윗을 계속 읽었다.
그렇게 내가 본 광경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내가 본 사람들의 모습은 시위를 하러 온 게 아니라 그 혼란을 틈타 도둑질을 하려는, 무식한 미국 하층민의 모습이었다. 대놓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와서 전자제품 상가의 문을 깨고 들어가 전자기기를 훔쳐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문을 닫은 월마트 (월마트는 밤에 영업을 종료해도 정문은 열려 있다) 에 들어가 대형 TV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ATM기를 딸 수가 없어 기계 자체를 밧줄로 묶어 집으로 질질 끌고 가려는 사람도 있었다. 보석상의 철문을 뜯으려다가 경찰에게 쫓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역 신문사의 트위터 계정에는 시위대가 한 번 심하게 털고 간 음식점의 사진까지 올라왔다. 음식점에서 도대체 뭘 뜯어먹으려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아, 그리고 건물 하나가 통째로 불타 무너졌다. Champs라는 스포츠용품 판매점인데, 어떤 놈이 통통통 튀어가서 불을 지른 후 해맑은 얼굴로 뒤돌아 가던 길을 갔다는 얘기가 있다. 말 그대로 방화죄를 저지른 것인데, 범인은 못 잡겠지 싶다. 아래 사진을 보면 오른쪽 가장자리에 Saigon Bay라는 식당이 보이는데, 이 곳은 나름 탬파 근방의 맛집이었던 데다가 가족이 몇십년 간 운영해 오던 곳이었다고 한다. 사진에서는 아직 불이 닿지 않았지만 이 사진이 찍힌 후 불길이 퍼져 나가 저 식당마저 모조리 불타 버렸다.
시위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불을 지르고 물건을 훔치면 결국 경찰 입장에서는 더욱 강하게 진압을 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이겨도 지는 싸움이 되는 것이다. 평화로운 시위를 해야 서로 대화가 되고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을 수 있는데 이 사람들을 보면 그저 한 사람의 죽음을 더럽힌 짓을 했다고밖에는 말을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지금이야 잠잠해졌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언젠가는 다시 경찰이 과잉진압을 할 것이고, 언젠가는 또 대판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라던 미국의 숨겨진 민낯이랄까.
사실 이 글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서술하고 싶었는데, 말이 좀 길어졌다. 미국이 진짜 불타는 이유는 한낱 시위대 따위 때문이 아니라 전세계를 망가뜨린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며 앵무새마냥 미국은 위대하다는 말만, 우리는 잘 하고 있다는 말만 외쳐 대던 희대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그 정부 때문이다. 몇 달 전만 해도 미국에 있는 내 입장에서 한국은 중국과 인접한 국가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내가 보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무너질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국은 총 확진자 수 13,000명대를 넘기지 않으며 안정권에 들어섰고 미국은 확진자가 늘어나는 속도에 가속도가 무섭게 붙어 현재는 1일 7-8만명의 신규 확진자가 생기는 상황이다. 내가 살고 있는 플로리다 주만 해도 원래는 확진자가 많지 않다가 결국 관광업이 주요 산업이라는 특성 때문에 마이애미와 탬파에 관광객이 몰려 1일 13,000명에서 15,000명까지 신규 확진자가 생기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세 가지 생각이 든다. 첫 번째 생각은 '걸려도 무증상인 상태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코로나바이러스의 치사율은 치명적이라기에는 어려운 편이며, 자신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줄도 모르고 자연 치유되는 일도 많다고 한다. 두 번째 생각은 '언젠가는 걸리지 않을까'. 애초에 코로나바이러스 예방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극도로 한정된 상황에서 앞으로 5달 남짓한 시간 동안 이 곳에 살면서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말 그대로 요행을 바라는 게 아닐까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생각은 '겁난다'.
맞다.
솔직히 좀 걱정된다. 아니, 많이 걱정된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연구실에 가면서도 요즘은 조금만 몸 상태가 안좋아도 코로나바이러스 생각부터 나며, 진짜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은연중에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가족에게는 말을 해야 하나? 지금은 괜히 걱정할까봐 말을 안 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러다가 내가 코로나바이러스에 제대로 당하면?
그렇다. 여기선 진짜 목숨을 걸고 일을 하는 중이다. 한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를 걱정하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가소롭다. 한국에 있는 내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옥불에서 불타는 사람 입장에서 촛불 뜨겁다고 징징거리는 것 같다고. 미국은 지옥불에 불타고 있다. 그래서 올해 미국 대학에 합격한 학생들 중에 미국에 혹시라도 오려는 사람이 있다면 극구 말리고 싶다. 이 곳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평소의 미국보다 훨씬 더.
코로나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미국은 오지 마라. 올해 미국 대학에 올 예정이었던, 내가 아는 동생에게 그렇게 말을 했다. 살고 싶으면 오지 말라고. 한국에서 군대를 가든 공부를 하든 제발 거기 남아 있으라고. 지금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잘 지내는 것 같아도 은연중에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스트레스가 꽤나 되는 편이다. 겉보기에 평화롭다고 진짜 평화로운 건 아니니까, 정말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번 추천곡은 정우물의 'blue'. 가끔씩은, 이렇게 조용한 노래를 들으며 불타는 내 세상을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밤에 집에서 불 다 끄고 듣기에 좋은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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