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hilosopher's Haven

어느 20대 후반 남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일상이야기

좋은 소식 하나

abcdman95 2020. 1. 14. 09:17

작년 여름 방학 3달은 내 대학원생 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 매일 오후 8-9시에 집에 오며, 주말에는 오후 11시까지 연구실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유인즉슨 교수와 연구계획서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연구비도 연구비지만 만약에 상을 받게 된다면 그 이름값이 꽤나 좋은 곳에서 돈을 받는 것인지라 교수도 나도 두뇌와 몸을 풀가동하고 있었다. 자세히 말하면 National Science Foundation, 미국의 국립과학재단이다. 미국 내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과학 관련 연구를 지원하며, 그 중에서도 내 교수를 비롯한 신참 교수들이 받을 수 있는 상은 NSF Career라는 상이었다. 연구비 지원은 5년간 3-6억원을 지급하며, 그 가치는 대학원생 한 명을 졸업 때까지 책임질 수 있는 경제적 지원 그 이상이다.

 

지난 주 어느 날, 내 지도교수에게 Slack 메시지가 날아왔다. 자기 오피스에 잠깐 들러 줄 수 있냐고 묻는 메시지였다. 당시 차의 엔진오일을 교체한 후 일찍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다시 학교 캠퍼스로 향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교수는 대학원생 어드바이저인 교수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요새 내가 석사만 따고 튈 수도 있다는 귀띔을 해 줘서 교수 볼 면목이 없었는데, 대학원생 어드바이저랑 대화를 하고 있다니!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지 긴장을 바짝 하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보니 돈을 바로 쓸 수 있다느니 하는 얘기가 들려 왔는데, 그걸 들은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저건 내 얘기가 아닌데?

 

옆에서 그렇게 기다리던 중 교수가 대화를 마친 후 나를 보며 빨리 들어와 보라고 손짓했다.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맞다.

 

NSF에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연구계획서가 완벽히 합격한 것은 아니지만 교수 말로는 99% 확실하단다. 교수는 지금껏 내가 본 적이 없는 상기된 모습으로 나에게 컴퓨터 화면을 보여 주며 내 눈으로 NSF 프로그램 매니저의 이메일을 읽게 해 주었다. 그리고는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악수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딱히 한 것이 없다. 교수가 연구계획서를 잘 작성해 주었고, 난 그에 상응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으려 했지만 도무지 원하는 패턴을 에칭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내 파트는 없는 것이다. 물론 교수의 연구계획서 내용에 도움이 되는 아름다운(?) CAD 렌더링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걸로 '난 내 할일을 했소!' 라고 말할 수는 없잖은가.

 

아무튼 다행스럽게 됐다. 정년트랙 (tenure-track, 교수로 임명된 후 학교가 교수의 직책을 평생 보장해 주는 tenure 교수가 되기 위한 과정) 을 밟고 있는 내 교수 입장에서는 첫 해 여름에 생전 처음 제출한 연구계획서로 심지어 초기 연구 결과도 없는 상태에서 NSF Career 펀딩을 받게 된 것이니 그의 이력서에 꽤나 가치 있는 스펙이 하나 생긴 셈이고, 대학원생인 나 역시 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NSF Career 펀딩을 받은 것이니 후에 박사 과정에 다시 지원할 일이 생길 때, 그리고 나아가 (만약 내가 정말로 교수가 될 경우) 학교에서 면접을 볼 때 상당한 이점을 가져가게 된 것이다. 물론 연구비가 얼마나 들어올 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연구비 요청은 약 50만 달러 (한화 6억 원 가량) 로 했다고 하는데, 보통 연구비의 절반을 학교가 가져가기 때문에 사실상 연구팀에 들어오는 돈은 약 3억 원이며, 그 정도 금액이면 상기한 것처럼 대학원생 한 명을 졸업시킬 수 있는 양밖에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의 네임밸류 자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최근 교수랑 대화한 바로는 아무래도 석사 학위를 먼저 취득한 후 병역을 해결하고 나서 다시 박사 자리를 찾아 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상 덕분에 내 기여도는 어떻든 간에 지도교수에게 상대적으로 덜 죄송할 수 있게 되었다.

 

20대는 모험의 시기라더니 진짜 별의별 모험을 다 하고 있다. 대학원부터 부모님이 조심스럽게 '힘들면 그냥 나와도 된다'고 했을 정도로 모험이었고, 대학원에서는 학업 외에도 빈약한 경제력으로 직접 구매한 차량을 타고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 여행을 다니는 모험을 했으며, 이제는 나름 미래가 보장된 학교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떠나 더욱 밝은 미래를 좇겠답시고 새로운 모험을 떠나게 되었다.

 

내가 아는 연세대 박사님 한 분이 최근에 KIST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에서 일하게 되셨는데, 그분께 이메일을 통해 KIST에서 전문연을 하는 방법을 여쭤 보았더니 자신이 정착되는대로 이런저런 정보를 주겠다고 하시며 다 잘 될 것이니 걱정 말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어지간히도 걱정하는 티가 났던 것일까. 그 동안 대략 10명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아직 내 걱정을 떨칠 수 있을 정도로 뭔가 답이 나오지는 않은 상태이다. 뭐 전문연이 확실히 정해질 때까지 걱정을 안 할 수 있겠냐마는.

 

가능하면 KIST에서 3년간 연구를 하고 싶다. 분야는 당연히 나노공학을 이어갈 생각이고. 내 현재 지도교수와도 건너건너 아는 분과 일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 진행해 온 프로젝트도 계속 이어갈 수 있을 텐데, 사실 지금은 어디라도 제발 되라 하는 심정이다.

 

오늘의 추천곡은 최근에 정말 많이 듣는 인디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2019년 앨범 '속물들'에 수록된 곡, '서른'이다. 보컬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가수 이아름 씨가 맡게 되었는데, 목소리가 브로콜리 너마저의 평소 음색과 너무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들었다. 이제 나도 서른이 되기까지 4-5년밖에 남지 않았기에, 점점 공감이 되는 가사가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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