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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20대 후반 남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일상이야기

올드카 유지관리 후기

abcdman95 2025. 5. 3. 13:46

이제 미국에 도착한 지 4달째.

 

수업 가르치랴, 수업 들으랴, 틈틈이 연구하랴, 꽤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는 중이지만 그 와중에도 취미생활은 꼬박꼬박 하고 있다.

 

기름때 뒤집어써 가면서 차 고치는 게 취미생활 맞나...? 엄밀히 말하자면 차를 고치는 게 아니라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기는 게 취미생활이긴 한데, 대학원생으로서 빈털터리가 되지 않고 후자를 즐기려면 전자는 패키지마냥 함께 딸려 오게 되어 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드디어(라기엔 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1월 초에) 내 드림카를 샀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난 포르쉐!!! 난 벤츠!!! 등등 뭐랄까 평범한(?) 차를 현실적인 드림카로 삼고, 흔히들 말하는 '포람페'를 꿈의 드림카로 삼겠지만, 난 약간 독특한 취향이라 올드카가 내 드림카였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도 20대 남짓 있다는 R107 세대의 벤츠 SL.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생산된, SL시리즈 중 최장수 모델이자 내가 처음 보자마자 그 멋진 비율에 반했던 명차. 내가 구매한 모델은 1988년식 560SL로, 450SL - 380SL의 계보를 잇는 해당 세대의 최후기형이자 가장 '육각형'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모델이다.

 

오랜 시간 로망이었던, 자차로 자동차 견인하기.

 

이제 40년 가까이 돼 가는 자동차에 스펙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엔진만큼은 참 생각할 때마다 신기하다. 2000cc급 4기통 엔진이 대중화되어 가며, 심지어 1000cc 초반대 3기통 엔진도 달려 나오는 요즘 시대에 무려 5600cc 자연흡기 8기통이라니. 아, 물론 그 당시 환경법으로 인해 그 무식한 배기량을 가지고도 막상 힘은 220마력 남짓밖에 안 나온다.

 

차를 나름 저렴하게 구입해서 트레일러에 실어 모셔온 후, 그 동안 꽤 많은 걸 수리해 주었다. 브레이크 계통을 오버홀해 주었고, 타이어도 4짝 모두 신품으로 교체했으며, 미션오일과 필터도 교환했고, 파워 스티어링도 오일이 새서 기어박스며 펌프며 신품으로 교체했다. 이 중 미션오일 빼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의 작업이 아니라 2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클래식 벤츠 전문 정비소에 몇 번 맡겨야 했다.

 

하드탑을 제거하고 나면 기계세차는 꿈도 꾸면 안 된다.

 

인터넷에서 뚜따(?) 차의 현실이라며 자조적으로 푸념을 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생각보다 뚜따할 일이 없다던가, 고속으로 달리면 시끄럽기만 하다던가, 에어컨을 틀어도 묘하게 더 덥다던가 (내 차는 아직 에어컨이 되지도 않는다ㅋ), 뚜따할 때마다 시선이 쏠려서 민망하다던가. 사실 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이 차를 두고 한 말이 '내향인은 몰 수 없는 차'이다. 나 내향인인데.

 

그래도 좋다. 날씨 좋은 날 밤에 뚜껑을 열고 한적한 도로로 나가서 드라이브를 하면 시원하고 조용하고 평화롭고 혼자 다 한다. 적절히 울려 오는 8기통의 우렁찬 엔진음도 좋고, 살짝살짝씩 액셀을 깊게 밟을 때마다 느껴지는 가속력도 좋고, 심지어 주유할 때 가끔씩 와서 차를 칭찬하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좋다.

 

데일리카와 세컨카. 의도한 건 아닌데 얼떨결에 2대 모두 흰색이다.

 

그리고 뭐, 그냥 차를 볼 때마다 예쁘게 생겨서 좋다. 자동차들이 점점 뚱뚱해져 가는 요즘, 안전성 면에서는 약간 부족할지언정 늘씬한 바디라인, 그 중에서도 멋지게 쭉 늘어진 본넷을 보면 디자인 참 잘했지 싶다.

 

지금 계획대로라면 여름 방학 동안 천천히 하나하나 작업해 가며 고친 후, 가을학기 이후부터는 상대적으로 장거리도 뛰어 볼 생각이다. 처음은 편도 1시간, 그 다음은 2시간, 그 다음에는 3시간, 등등. 차는 달리라고 있는 거니까 열심히 운동하게 해 주어야지.

 

가끔씩 드는 생각이지만 한국에서 구형 볼보를 데일리로 몰면서 나름 공부해 둔 게 의외로 도움이 되는 중이다.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자동차의 다양한 부분에 대해 직접 자가진단도 해 보고 부품도 구매해 보고 심지어 직접 설치까지 해 본 경험이 그래도 조금이나마 '짬'이 되었지 싶다.

 

앞으로 할 일은 많다. 나열해 보자면:

  • 냉각수 호스 교환 (예방정비)
  • 파워스티어링 호스 추가 교환 (예방정비)
  • 컨트롤암, 스태빌라이저바 등의 부싱 교환, 볼조인트 교환 (수리)
  • 앞뒤 쇼바 교환 (수리)
  • 전 주인들 중 누군가 떼어간 에어컨 다시 설치 (수리)
  • 블루투스 되는 모델로 라디오 교환 및 스피커 교체 (업그레이드)
  • 시트 쿠션 보강 및 위치조정 레일 윤활 (수리)
  • 자동차 잠금장치 정비 (수리)
  • 번호판을 올드카 전용 번호판으로 교환 (업그레이드)
  • 깨진 전면부 스포일러 보강 (수리)
  • 휠 청소 및 광택
  • 내부 청소 및 광택
  • 엔진룸 청소

재밌는 건, 이것들 다 직접 진행할 예정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근데 솔직히 말해서 하부 부싱류 교환 외에는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라 충분히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뭐, 직접 해야 돈 아낀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예쁘다. 내 눈에만 그런 건가?

 

올드카는 부자의 취미라던데, 부품 구하는 게 마냥 쉽지는 않은 걸 빼면 또 그렇게 유지보수가 어렵지도 않다. 아, 부품 구하기 쉽지 않은 게 좀 큰가......? 아무튼 딱히 큰돈 들이지 않고 손에 기름때 좀 묻혀 가며 40살 가까이 된 자동차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중이다.

 

오늘의 추천곡은 콜드플레이의 Coloratura. 한국을 떠나기 직전에 알게 된 곡인데, 그래서 그런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괜히 그 때의 싱숭생숭했던 감정이 같이 떠올라 기분이 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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