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지 2주째, 드디어 필름카메라로 찍은 결과물을 받아 보게 되었다. 삼고초려라고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영입하기 위해 그의 집을 세 번이나 방문했다는 말이 있는데, 우연의 일치겠지만 나 역시 근처 홈플러스에 있는 코닥 사진관에서 필름을 구매하려고 세 번을 방문해야 했다. 첫 날은 오래된 필름으로 찍은 첫 롤을 스캔해 달라고 부탁하려다가 결과가 안좋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새 필름을 사려다가 좌절, 둘째 날은 새 필름이 분명 배송된다고 했는데 배송이 하루 늦어지게 됐다고 말씀하셔서 좌절, 셋째 날은 드디어 잘 오셨다는 말을 들으며 성공.
카메라 바디는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니콘 FM2.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구매한지 40년이 지난 클래식 수동 카메라이다. 노출계 외에는 셔터부터 조리개 개폐까지 모조리 기계식으로 작동하여 배터리가 필요없는, 사실 그래서 더 매력적인 물건이다. 바디 전체가 금속제라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캐논 EOS 550D에 비해서 훨씬 묵직하다. 덩치는 더 작은 녀석이!
렌즈는 총 3종류가 있다. 표준 단렌즈 NIKKOR 50mm f/1.4S, 표준 줌렌즈 POLAR MC AUTO ZOOM 1:3.5-4.5 f=28-70mm, 망원 줌렌즈 MAGNON AUTO ZOOM 1:4.5 75-200mm. 브랜드가 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 NIKKOR사의 표준 단렌즈가 제일 마음에 든다. 당연히 단렌즈인 만큼 화각조절과 줌이 안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를 보완하기 위해 2배 줌 어댑터가 따로 있어 멀리 있는 피사체를 촬영하고 싶으면 그 어댑터를 끼우면 된다.
렌즈만 있어도 행복할 상황에서 무려 필터도 여러 가지가 있다. 렌즈별로 자외선 보호 필터가 끼워져 있는 건 물론이고 겐코 사의 스노우 크로스 필터 (빛을 눈 결정마냥 갈라지게 해 반짝인다는 느낌을 줄 때 사용), 크로스 레인보우 필터 (스노우 크로스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프리즘처럼 빛을 무지개빛으로 나눔), 그리고 안개 필터 (말 그대로 흐릿한 효과를 주고 싶을 때 사용) 가 따로 있다. 무려 작은 전용 케이스에 담겨서. 추가로 플래시도 있는데, 이놈은 또 자기만의 갈색 가죽 가방에 담겨 있다.
그냥 카메라에 렌즈 하나만 있었어도 그럭저럭 잘 다녔을 텐데, 삼각대도 두 대나 있으니 얼떨결에 출사 풀세트를 장비하게 되었다. 꿀이다!
할아버지께 이 사진기를 보여드렸다니 옛날 생각이 나신다며, 그리고 오래오래 잘 쓰라고 하셨다. 아직 정정하신 할아버지이신데 유품을 미리 받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지만 그냥 좋은 사진기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옛날에 직접 쓰셨던 카메라이니만큼 더 소중하게 다뤄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도 문제가 생기면 계속 수리해서 몇십 년이고 쓰다가 도무지 회생이 안될 경우에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용할 생각이다.
아무튼, 서론이 길었다. 코닥 필름이 따뜻한 (나쁘게 말하면 누런?) 색감이 나오고, 후지필름의 필름이 청량한 색감이 나온다고 하던데, 첫 롤은 코닥 필름이다. 별 이유는 없고 홈플러스의 사진관이 코닥이어서. 나 정도면 사진관에서 인화를 얘기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서는 되게 어린 편일 텐데도 정말 친절하게 잘 대해 주셔서 계속 일산에 거주할 생각이었다면 단골이 되었을 것만 같은 곳이다. 아무튼 망한 건 과감히 버리고, 그나마 봐줄 만한 사진만 올린다.
바디: 니콘 FM2
렌즈: NIKKOR 50mm f/1.4S
필름: 코닥 COLORPLUS 200
먼저 일산호수공원에서 찍은 사진들부터.
아래의 사진들은 화정동의 친척집 근처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첫 필름은 망했다고 하기에도 뭣하고 흥했다고 하기에도 뭣한 느낌이 든다. 필름은 한 롤당 한 장만 잘 나와도 성공한 거라던데, 글쎄. 코닥필름의 색감이 내 취향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청량한 사진만 찍기보다는 가끔씩 이렇게 따뜻한 색감의, 뭔가 정말 오래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사진도 몇 장 찍고 싶을 듯하다. 코닥과 후지필름을 번갈아 가며 써 봐야겠다.
오늘의 추천곡은 아이유의 라일락 앨범 전곡. 사실 예전에는 아이유의 목소리가 너무 앳된? 느낌이 들어 그닥 좋아하지 않았는데 듣다 보니 청량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특징인 '자기 이야기를 노랫가락에 써내려가기 때문에'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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