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hilosopher's Haven

어느 20대 후반 남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오피니언

정부가 내 학교를 죽이려 한다.

abcdman95 2021. 4. 27. 23:49

 

난 민족사관고등학교를 다녔다. 이미 졸업한지 수 년이 지나 고등학교 시절이 과거의 추억 혹은 흑역사로 남은 지금도, 이미 나의 모교라고 하는 그 학교가 많이 변한 지금도, 난 민족사관고등학교 학생이다.

 

내가 민사고를 다녔다고 하면 화들짝 놀라는 사람들에게 민사고도 고등학교일 뿐이예요~ 라고 가볍게 웃어넘기면서도 나에게는 내심 민사고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저 남들에게 그 자부심을 드러내기에는 너무 민망할 뿐. 그리고 그 자부심에 대한 근거는 단지 내 동기들이, 그리고 내가 평균보다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 능력 있는 사람들이 내 동기인 것과 내 자신이 능력 있는 사람인 건 좋지. 하지만 그건 자신감의 근거가 될 뿐, 자부심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민족사관고등학교에 대한 내 자부심은 교육에 대한 이 학교의 철학에 기반한다. 똑똑한 학생들을 모아 좋은 대학을 보내겠다는 알량한 목표 따위가 아니다. 민사고의 교훈을 보면 답이 나온다.

 

"민족주체성 교육으로 내일의 밝은 조국을

출세하기 위한 공부를 하지 말고 학문을 위한 공부를 하자.

출세를 위한 진로를 택하지 말고 소질과 적성에 맞는 진로를 택하자.

이것이 나의 진정한 행복이고 내일의 밝은 조국이다."

 

문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이 교훈은 민족사관고등학교의 이사장인 최명재 선생님이 직접 읊으셨다는 구절이다. 그리고 졸업 후 한참이 지난 지금, 난 여전히 이 교훈을 따르며 살고 있다. 취직이 잘 되는 전공을 선택하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전공을 선택했고, 돈을 많이 주는 직종보다는 내가 행복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직종을 선택할 계획이다. 물론 대학원을 다니고부터는 농담조로 출세 안 하면 연구비를 못 따오니까 일단 출세해야 하고 싶은 일이고 나발이고 할 수 있다고 얘기를 하지만, 항상 출세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있다. 그래서 대학원에 간 거고.

 

똑똑하고 마음은 텅 빈 사람들을 만들기보다 똑똑하면서 마음마저 따뜻한 사람들을 양성하는 게 민사고의 목표이다. 저 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는구나, 가 아니라 저 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런데.

 

그런데 현 정부에서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죽이려 한다. 내 학교뿐만 아니라 외고도, 과학고도 포함이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나에게 가장 아픈 건 민사고다. 나뿐만 아니라 민사고에서 3년간 몸담았던 모든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에게 마음의 안식처였으며 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준 곳을, 그리고 조금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설립 목적부터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그 사회에 봉사하는 '촛불'이 되기 위해서였던 곳을,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죽이려 한다.

 

이유마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공평한 교육을 위하여'.

 

공평성은 모두에게 똑같은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어울리는 교육을 최대한 제공하는 것이다. 더 배우고 싶은 학생에게는 더 배우게 해 주고, 색다른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에게는 색다른 공부를 하게 해 주는 것. 그게 공평한 교육 아니던가? 그게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교육이 아니던가?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그게 싫단다. 현재 초중고등학교의 처참한 공교육 수준은 처절히 무시한 채, 일단 잘하는 놈들부터 끌어내리고 생각해 보겠단다. 마치 국내의 모든 특목고들을 일반고로 전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그래, 특목고가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특목고 때문에 입시 경쟁이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되고, 특목고 때문에 학비가 부담스러운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도 일반고에 가는 일이 생긴다. 특목고 때문에 학생들 간의 서열화가 생기고, 특목고 때문에 어린 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압박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래, 특목고 때문에 '더 공평할' 수도 있었을 대한민국 사회가 '덜 공평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왜 특목고 탓을 하는가. 공교육의 질이 더 좋았다면, 고등학교 3년은 수능 공부하는 시간이라는 인식이 없었다면 특목고에 학생들이 그토록 몰렸을까? 왜 종로에서 뺨을 맞고 한강 가서 눈을 흘기냐는 말이다.

 

우린 그저 대한민국 사회를 이끌던 우리 부모 세대들이 하라는 대로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간 학교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인재로서 대한민국을 위해,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사상을 배웠고, 비록 모든 민족사관고 졸업생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모두들 올곧은 사고방식으로 열심히 자신들의 삶을 사는 중이다. 그리고 그렇게 피튀기게 공부했던 우리도, 그렇게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우리도 고등학교 3년 동안 추억을 쌓았다. 마지막으로, 난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것들을 현 세대의 뛰어난 어린 학생들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저 수능이라는 허접한 대입 시스템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면서도 동아리 활동도 하고, 하고 싶은 취미활동도 해 보고, 밤 늦게까지 친구들이랑 음악 틀어놓고 공부도 해 보고. 그랬으면 좋겠다.

 

어처구니가 없다.

 

한심하고,

 

원망스럽다.

 

난 민사고가 사라지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믿음을 버릴 생각이다. 국민에게 투자하지 않는 국가는 내가 봉사할 가치가 없다. 내가 얻은 기회는 한국에서 준 게 아니라 나의 부모님이 피땀 흘려서 만들어 주신 것이니까. 그리고 민사고가 사라진 후의 중학생들에게는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혹시 먼 미래에는 다시 민사고 같은 학교가 생겨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리고 그 때에는 다시 뜨거운 마음과 똑똑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갖고 민사고가 되고 싶었던 '촛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대한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